신라 31대 신문왕, 정명은 문무왕의 둘째 아들로 재위 기간은 681년~691년으로 11년간입니다. 짧은 재위 기간이지만 어떤 왕들보다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국사시험에 꼭 한 문제 정도는 나올 정도로 중요한 왕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신문왕의 업적위주로 알아보고, 왕릉에 대해서는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왕, 신문왕
665년 동복형 소명태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신문왕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과 아버지 문무왕의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자랐어요. 성인이 되고, 태자가 되면서부터 이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마 배우고 느끼고 있었겠지요.
진골귀족의 득세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면 전쟁 공신들은 거만해지며, 자신들의 공로에 대한 지분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통일된 더 넓은 나라의 통치를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지요. 여기에 사유화된 화랑세력을 기반으로하는 진골귀족과 왕권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어요. 이 충돌의 결과가 김흠돌의 난입니다.
김흠돌의 반란과 화랑제도의 폐지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발생한 김흠돌의 반란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어요. 김흠돌은 전쟁 공신으로 그 당시 가야계가 장악한 화랑들의 풍월주 출신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또한 가문도 어마무시합니다. 어머니가 김유신의 셋째 여동생 정희이니, 즉 김유신은 외삼촌이 되겠네요. 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가 또한 이모이고 보니 이만한 뒷 배경은 신라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문무왕도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서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문무왕은 이후 진골귀족에 대한 견제를 서서히 시작합니다. 더구나 든든했던 배경인 이모 문명 황후가 죽고, 태자비가 된 김흠돌의 딸이 태자의 총애를 잃고 자식도 생기지 않자 김흠돌은 자신의 권력이 없어질까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문무왕이 병석에 눕자 이 기회에 정명 태자를 폐위하고 다른 왕자를 왕위에 올리려 합니다. 하지만 이를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던 문무왕의 왕비인 자의황후와 정명태자는 미리 손을 써 반란군들을 제압하고 난을 평정합니다.
이 반란으로 많은 진골귀족들이 숙청되고, 귀족들의 사병화된 화랑제도를 폐지하여 기존 화랑들을 병부에 예속시킵니다.
그리고 태자비 김씨(김흠돌의 딸)를 폐위시키고, 김흠운과 요석공주 사이의 신목황후를 왕비로 맞아 드립니다.
이 모든 일들이 문무왕이 죽은 후 불과 3개월 안에 일어난 일이니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알 것 같습니다.
김흠돌의 난은 별도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국가 통치제도의 확립
반란을 진압한 후 신문왕은 그동안 배우고 생각했던 일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합니다.
아래 내용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1> 중앙부처를 14부로 개편하고, 예작부(토목, 보수) 신설
2> 지방을 9주 5 소경으로 개편
새로 편입된 백제, 고구려 땅을 포함해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밑에 군, 현을 두어 세분화했어요. 그리고 각 주에는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지역에는 소경을 설치해 수도가 한쪽에 치우친 단점을 보완하려 하였어요.
3> 군사제도를 9서당, 10정으로
중앙군을 9 서당으로 했는데 여기에는 백제인, 고구려인은 물론 말갈인들까지 포함했습니다. 지방에는 각 주당 군사요충지에 1 정의 군대를 두었는데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인 한주는 지역이 넓고, 국경지대라 2정을 두었어요.
4> 국학 설치
국학은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유학을 가르치는 대학입니다. 나중에 원성왕대에 가면 여기서 배운 후 시험을 치러 관리로 등용하는데 등급을 3등급으로 나누어 뽑는다고 독서삼품과라 합니다.
5> 토지제도를 정비 귀족들의 녹읍 폐지, 관료전 지급, 수조권만 인정
요것이 최대의 핵심이지요. 신라는 귀족과의 힘겨루기가 처음이자 끝인 나라입니다.
관료전을 지급한다는 것은 수조권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녹읍을 지급할 때는 수조권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노동력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어요. 이는 그 지역의 사람들을 사병화할수도 있고 마음대로 동원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빼앗음으로써 귀족들의 권한은 많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어요.
6> 불교를 장려하고 의상의 화엄종으로 국민화합을 도모했습니다.
신문왕은 11년간의 재위 기간에 정말 많은 일들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루아침에 계획하고 실행할 수는 없겠지요. 어릴 때부터 배우고, 태자로 있으면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계획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왕위에 오를 때쯤은 어느 정도 준비된 왕이 아니었나 생각되네요.
감은사와 만파식적
감은사는 문무왕이 불력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바닷가에 사찰을 짓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성하고 감은사라 했다고 합니다.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되어 신라를 지키겠는 문무왕을 위하여 대왕암과 가까운 감은사의 금당 바닥을 뚫어서 드나들기 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재 감은사의 금당 자리는 석재로 연결되어 바닥 밑이 비어 있고, 동쪽 바다 방향으로는 용이 드나들었다는 용혈을 볼 수 있어요.
감은사는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삼층석탑 2기가 남았는데 신라 최고의 크기를 자랑합니다. 직접 탑 앞에 서면 감동이랄까, 뭐라 할까 하여튼 가슴으로 훅 밀려옵니다. 개인적으로 황룡사지 장륙 존상 석조 좌대와 목탑지 그리고 여기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신라유적 중 '최고 중의 최고'입니다.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ㅎㅎㅎ
감은사에서 동쪽 바닷가에 이견대가 있는데 신문왕이 김유신과 문무 왕으로부터 받은 만파식적과 관련된 곳입니다.
이 피리를 불면 가뭄도 없어지고, 적군도 물러나는 이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름그대로 나라 앞의 만가지 파도 즉 근심은 이 피리 하나로 다 해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새롭게 시작하는 통일된 신라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화왕계와 인재 등용
신문왕은 종종 설총을 불러서 국정에 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설총이 꽃들을 의인화하여 인재 등용에 관한 조언을 한 이야기를 '화왕계'라고 하는데 화왕과 아첨꾼 장미와 충언을 하는 할미꽃을 인재에 비유해 누구를 등용할것인가의 이야기로 삼국사기에 실려있다고 합니다.
설총은 신문왕과는 사사로이는 처남 매부 관계가 되지요. 신목왕후의 아버지는 김흠운이고, 어머니는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입니다. 설총은 김흠운이 죽은 후 아버지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이에서 태어나 신목황후와는 이복동생이 되네요.
그래서 신문왕은 설총과 더더욱 친하게 지냈는가 봅니다.
김오기의 아들 김대문 그리고 화랑세기
김흠돌의 반란 때 자의황후의 명으로 신문왕편에 서서 진압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오기입니다. 거의 마지막 풍월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기는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의 아버지이지요. 여기서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쓴 연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의 마지막 풍월주인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또는 위로 위해 화랑들의 리더, 풍월주의 내력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황복사와 신문왕
황복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름만으로 황실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이곳의 지명이 구황동인데 9곳의 황실 사찰이 있다고 구황동이라 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황룡사, 분황사, 그리고 이곳 황복사만 남아 있어요.
원래 있던 사찰에 신목황후와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삼층석탑 2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 효소왕 사후에 동생 성덕왕이 삼층석탑 안에 불상과 사리 장엄구를 만들어 넣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금제 여래입상과 좌상은 모두 국보로 지정되었고, 기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과도기적 양식의 신문왕릉
신문왕릉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의 남쪽 끝자락에 있습니다. 사천왕사지와는 거리가 아주 가깝지요. 능역은 좁고 앞쪽은 담으로 둘러져있고 남쪽 홍살문을 통해 들어 길수 있습니다. 봉분은 전돌 모양 5단 석축을 쌓고 석축 위에는 둘레석을 놓아 봉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석축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직삼각형의 지대석으로 석축의 무너짐을 방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선덕여왕릉의 보호석은 보이는 부분만 평평한 막돌로 구성했는데, 그것보다는 좀 더 세련된 모습입니다. 하지만 석인, 석수 등의 부속물과 십이지신상 등의 문양은 보이지 않아서 완성형 양식인 성덕왕릉이나 괘릉의 전 단계 양식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신문왕과 관계된 것을 모아서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김흠돌의 반란과 황복사지에 대하여는 차후에 별도로 포스팅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