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포항 북쪽에 있는 비학산으로 유명한 신광으로 한번 다녀보겠습니다. 유서 깊고 살기 좋은 동네 신광은 어떤 전통, 어떤 볼거리가 있을까요.
역사의 향기가 묻어나는 신광
신광이라는 지명은 진평왕때 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진평왕이 이곳에 왔을 때 비학산에서 밝은 빛들이 뻗쳐 나오는 것을 보고 신광(신령스러운 빛)이라고 한 뒤 아직까지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진평왕 이전에도 신라의 왕들은 이곳을 자주 왕래한 것 같습니다. 냉수리 신라비나, 이곳과 가까운 중성리 신라비를 보면 왕이 직접 6부부족의 대표들과 다녀간 기록도 있습니다. 물론 그때의 왕은 지증왕입니다. 또한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보면 법흥왕이 울진까지 다녀간 것을 보면 동해안으로 가는 지름길인 이곳 신광은 당연히 거쳐 갔을 것 같아요. 선덕여왕도 이곳과 가까운 천곡사에서 피부병을 나았다는 기록을 보면 신라의 왕들은 이곳이 서라벌과 멀지 않은 곳이라 많은 왕래가 이었던 곳 같아요. 이런 걸 보면 그 당시 이곳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촌락도 꽤나 큰 편이었는던 것 같습니다.
신령스러운 산, 비학산
어느 쪽으로든 신광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비학산입니다. 정말 학이 날개를 펼친 듯이 신광면 전체를 한아름 포근히 감싸 안고 있지요. 한반도의 등뼈인 태백산맥의 끝자락에 동해를 향해 우뚝 선 모습은 신비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입니다. 그래선지 이 비학산 등잔혈에 묘를 만들면 자손이 잘된다는 속설과 이곳에 묘를 몰래 쓰면 가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런 이야기 때문일까요. 예전에는 가뭄이 심할 때는 동네 주민들이 새로 쓴 묘가 있는지 찾아다녔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신령스러운 산인 것은 분명한 것 같기도 합니다.
유서 깊은 사찰 법광사
비학산 자락에 자리 잡은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한 것으로 전해 집니다. 원효가 왕명에 의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에는 대웅전과 2층의 금당 향화전, 5층 석탑 등 525칸이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말이 525칸이지, 99칸 대감집의 5배가 넘는 규모라면 엄청난 크기라 할수가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불사리탑, 석불 좌대, 쌍두 귀부, 당간지주 등 석조유물만 남아 옛 영화를 쓸쓸히 보여 주네요. 그래도 아직 발굴 중이라 의미 있는 유적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신광면 냉수리에서 밭갈이하던 농부에 의해서 발견된 신라의 비석입니다. 이곳과 멀지 않은 중성리 신라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라의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명성을 날리던 유적이지요. 현재는 국보로 지정되어 신광면 사무소 마당에 비각을 세워 보관하고 있습니다. 원래 경주 박물관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발견된 장소에 유지되어야 한다는 애향심 가득한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이곳 신광에 보존할 수 있었어요.
그럼 비석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지 간략히 알아볼까요
비문이 발견된 곳이 사라국 진이마촌이라는 촌락인데, 절거리와 미추 그리고 사신지 세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데 세사람 사이에 재산권 분쟁이 일어났어요. 사실 이 분쟁은 지증왕 이전 2명의 임금 시절에도 세 사람의 조상들이 다툼을 벌였는데, 이미 그때 절거리의 조상들이 소유권을 인정받은 적이 있었지요. 이에 지증왕을 비롯한 7명의 왕(기록상, 此七王)들이 그때의 근거를 가지고 의논하여, 재산을 절거리의 소유로 인정하였어요. 만약 절거리가 죽으면 동생 아사노 또는 동생의 아들 아노가 소유권을 가지게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미추와 사신지가 또 이의를 제기하면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리고 더이상 말로는 못 미더웠는지 얼룩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현지 촌주인 유지간지와 수지일금지 두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잘 기록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이 비석에는 국호를 사라라고 표기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비석이 만들어지든 해에 국호를 신라로 공포 했는데, 이런 혼동은 아마 같은 해이지만 시기상의 선후가 있는것 같아요. 그리고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으로 표기한 것, 6부의 대표와 협의해 문제를 해결한 것 등은 그때까지도 왕의 권위가 미약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중죄라는 표현으로 볼때 사회적 규범인, 아주 기본적인 율령이 존재함을 알수 있어요. 갈문왕, 관등, 촌주, 도사 등의 명칭은 정치 제도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신라 고대사의 소중한 자료이자 유적입니다.
영일 냉수리 고분
6C 초 신라 때의 무덤으로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양식입니다. 5C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때까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 때문인지 고구려 무덤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도굴된 상태였으나, 관장식, 달개, 금반지 등 약 500여 점의 유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 지역 최고위층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근처 냉수리와 흥곡리 일대에는 80 여기가 넘는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서 이 지역은 일찍이 큰 세력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이것은 좁은 분지의 서라벌에게는 신광, 흥해의 넓은 평야가 식량공급의 든든한 배후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을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왕들이 직접 왕래해 중성리비와 냉수리비를 세워 관리할 정도로 남다른 관심을 보일수밖에 없었겠지요.
8.15 광복 신광면민 축구대회
뭐니 뭐니 해도 신광을 이야기할 때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8.15 광복기념 축구대회 일 것 같습니다. 36년간의 일제 식민지하의 조국을 잃은 민족의 울분과 아픔을 축구를 통해서 풀려고 한 의미도 남다르지요.
축구대회가 펼쳐지는 며칠간은 신광은 그야말로 축제이지요. 동네별로, 마을별로 마을의 명예를 걸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한 것 같습니다. 특히 군대 간 동향인들은 이 시기에 맞추어 휴가를 내고 참여하기도 하지요. 광복 후 6.25 전쟁 기간과 1980년 대가뭄을 제외하고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이어오는 저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시나 군 등의 큰 행정구역도 아닌, 면단위에서 이러한 전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보면, 신광 사람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뿐만 아니지요.
국보인 냉수리 신라비의 반출을 막은 것이나, 마북저수지 확장으로 수몰 위기의 700년 된 노거수를 옮겨 보호하는 등 이곳 사람들의 애향심은 정말 남다른 것 같습니다.
호리못(용연지)과 주변 매운탕집들, 비학산과 법광사, 마북지와 단풍이 아름다운 괘령 고갯길, 고분들과 어우러진 용천저수지 등 빼어난 경관과 유서 깊은 유적들, 거기에다 애향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인심까지 어느한곳 부족함이 없는 동네, 신광을 한 번쯤 가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개인적으로 신광이 고향은 아니나, 오고 가며 보고들은 모습이 많아서 제 나름대로 신광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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