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의 구분과 변화
경주에 가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신라의 고분들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서 기다려 줍니다. 커다란 고분들이 여기저기 시내 곳곳에 연이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지요.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이 옛 유적과 고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고분(무덤)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경주에 있는 고분들을 보면 우리는 죽음 보다는 푸근하고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분을 처음 본 외국인들은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크기에 한번 놀라고, 이렇게 사람 사는 가까이 있는 것에 놀라고, 아름답게 잘 보존되는 것에 또 놀란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자랑거리인 이러한 경주의 고분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발달해 가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고분들의 구분
고분은 옛날 무덤 가운데서 특히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통틀어 말합니다.
능 --- 왕과 왕비의 무덤, 무덤의 주인을 명확하게 확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총 --- 발굴하여 조사해본 결과 최소한 왕족 이상의 신분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피장자를 알 수 없습니다. 발굴 시 아주 특징적인 유물이 나올 경우 그 유물의 이름에 총을 붙여 고분의 이름을 정합니다.(예, 천마총, 금관총 등)
분 --- 역사적 기록이 없고, 아직 발굴하지 않아 능이나 묘로 단정할 수 없는 규모가 큰 무덤을 말합니다. 뒤에 번호를 붙입니다.
묘 --- 보통 왕과 왕비를 제외한 모든 일반인의 무덤입니다.(설총의 묘, 김양의 묘 등)
2> 신라 분묘 매장 방식의 변화
분묘와 장례문화는 시대가 변해도 쉽게 바꾸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명확히 구분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실 주검을 땅에 묻는다는 기본적인 것은 잘 변할 수가 없고 단지 매장의 방법이나 크기와 위치가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너무 깊이 알수도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기에 대략적인 개념만 잡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머진 연구하시는 학자들의 몫인것 같아요.
고인돌, 토광묘, 옹관묘-- (선사 청동기 시대)
목관묘--(기원전~ 2C중반)땅을 파고 목관을 넣고 봉토를 덮었습니다.
움무덤(덧널무덤)-- ( 2C ~4C전반) 목관묘를 목곽안에 넣고 무덤을 만들었어요.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4C후반~6C초반)-- 아주 중요하지요. 경주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고분 양식입니다. 별도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굴식 돌방무덤(수혈식 석실고분)--(6C이후~ ) 판석을 이용해 널을 넣는 방을 만들고 봉토를 만든 방식입니다.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통일신라 하대) 판석이나 돌을 이용해 널방을 만들고 연도(길)를 내어 입구를 돌(문)로 막는 양식입니다. 분묘를 집처럼 만든 모습이지요. 내부에 미리 준비를 하면 추가장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3> 경주 신라 왕릉 외형적 모습의 변화
가) 초기 신라의 고분들은 매우 크게 조성되었습니다. 둥근 봉분에 특별한 외형적인 구조물이나 장식들이 없습니다.
박씨왕, 석씨왕들의 능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또한 초기 김씨 왕들의 왕릉들로 현 시내에 있는 왕릉들 또한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평지형 왕릉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1C~6C중반, 오릉, 석탈해왕릉, 내물왕릉, 봉황대, 미추왕릉 등)
나) 평지형 왕릉에서 산지형으로 가는 과도기적 형태의 왕릉들이 나타나는데, 크기는 대체로 앞선 시대와 유사한 크기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그전에 없던 상석이나 비석이 세워지고, 봉분 둘레 하단 부분에 봉토의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하여 다듬지 않은 막돌의 보호석(둘레돌), 혹은 지석을 둘러 둡니다. 현재 흙이 흘러내려서 일부만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6C후반~7C중반, 무열왕릉이 있는 서악지구 고분군, 진평왕릉, 선덕여왕릉 등)
다) 이제 왕릉들은 좀 더 멀리 이동해 만들어집니다. 크기는 예전보다 조금 작아지지만 이제 완전한 형태의 왕릉을 만듭니다. 봉분 둘레를 아예 지대석을 깔고 면석을 세워 붙이고 중간에 탱석을 끼워 넣었습니다. 또한 그탱석에 12 지신상을 각 방위 맞추어 세기거나 별도로 만들기도 하지요. 또한 돌난간을 둘러 세우는 곳도 있어요.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과 혼유석을 만들고 정면 양쪽에는 무인석, 문인석 한쌍씩을 세워둡니다.
(7C후반~9C중반, 신문왕릉, 헌덕왕릉, 경덕왕릉, 흥덕왕릉, 원성왕릉 등)
라) 이제 왕릉들은 완전히 산지형으로 바뀌고 봉분의 크기도 작아집니다. 크기만 작아진 것이 아니라 봉분의 둘레석 정도만 둘러놓는 것으로 장식을 마감한 것 같습니다. 예전의 왕릉들과 비교해 초라하기 그지없네요. 신라 말기의 극심한 정치혼란과 국력의 쇠퇴로 인해 왕의 사후 장례에 대한 여력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9C중반~935년, 민애왕릉, 헌강왕릉 정강왕릉 등)
경주의 고분들에 관하여는 몇 편으로 나누어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간단하게 정리해 소개하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혹여 워낙 전문적인 부분이라 틀리는 부분이 있을 거라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대략 요거 정도라도 하는 마음으로 조금 부족 해도 정리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 두렵지만 해보았습니다.
앞으로 경주시내에 있는 왕릉들의 의미에 관하여 하나, 그리고 4C후반에서 6C 초반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에 관해서 또 하나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계속 찾아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 적석목곽분을 하기 전 흉노에 대하여 간단하게 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흉노편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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