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습니다. 분황사! 향기로운 기운이 도는 황실 사찰이란 뜻입니다. 절을 만든 왕은 선덕여왕(634년)인데, 그 당시만 해도 황실에서 주관해 만든 절들이 꽤 많이 있었을 텐데 굳이 왜 여왕은 또다시 절을 만들었을까요. 지금도 하나의 절을 만든데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드는데 말이에요. 오늘은 선덕여왕에 대한 많은 역사적 기록과 설화들이 있지만 인간 덕만에 대한 시각으로 분황사만을 연결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본래 여왕의 이름은 덕만인데, 아버지 진평왕이 석가모니 누이의 이름이 덕만이라고 해서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선덕은 죽은 후의 시호로 우리는 선덕여왕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1> 규모는 작지만 아늑하고 조용한 사찰
분황사는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황룡사가 있었고, 동쪽은 용이 나왔다는 연못이 있으며, 사찰뒤 북쪽은 알천(북천)이 흐르고, 그 긴 뚝 위에 절을 지었을 것 같습니다. 궁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그마하고 조용한 사찰인 것 같습니다.
2> 전불시 칠처가람 분황사
석가가 부처가 되기 전 과거 7명의 부처들이 경주의 신성한 7곳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행하였다던 곳을 전불 시 칠처가람이라 하는데 분황사도 칠처가람중의 하나입니다. 원래 칠처가람은 각 부족들이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숲이었어요. 소도라 할까 죄인이 들어가면 왕도 함부로 죄인을 잡으러 들어갈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지요. 그래서 불교가 도입되면서 부족들의 힘의 원천이랄까 근거인 신성한 숲에 그 자리는 원래 부처들이 예부터 설법을 행하던 곳이란 논리로 신성한 숲을 없애고 사찰을 하나씩 세우기 시작했어요. 그래야 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3> 불교 전래 초기 왕실의 불교 사랑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여 본격적으로 신라사회 전래된 후 신라는 이제 온통 불교 천지가 됩니다. 불교의 사상과 문화의 쓰나미는 이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지요. 이때부터 왕과 왕실에서는 앞다투어 절을 짓고 불교를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지요.
흥륜사, 영묘사, 황룡사 등 등 현재 경주 시내에 있는 사찰들과 불교 관련 유적들은 거의 초기불교 도입 시기인 이때에 만들어집니다. 왕과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좀 더 크고 좀 더 웅장하게 누구나 쉽게 보고 접근하기 쉬운 궁궐 근처에 사찰을 만들고, 큰 탑을 세우고, 어마 무시한 불상들을 만들었어요.
4> 여왕만을 위한 여왕의 사찰
그런데 가까이 큰 사찰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은 왜 굳이 절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여왕을 생각할 때 젊고 아름다운 여왕을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엄청나지요. 사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아무튼 젊은 여왕은 아니지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여왕은 한나라를 이끌고 가는데 아마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요. 실제 백제의 대야성 공격으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가 죽기도 하고, 내부적으로는 여자 왕에 대한 반감도 여전하였지요.
여왕은 어쩌면 한 번씩 조용하게 쉬면서 위안도 받고 싶고, 건강도 보살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분황사는 주불로 모든 중생들의 병을 치료해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어요.
5> 분황사에 나타나는 여왕의 흔적들
일제강점기 모전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 2층과 3층 사이에서 여러 가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시절 사용하던 황금바늘, 은제 바늘, 재단용 가위 등 여성용품과 수정 화주가 발견되었어요. 황금으로 된 물건이기에 아마 선덕여왕이 사용하던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여왕이 궁궐에서 다소곳이 앉아 옷을 만들고 바느질하는 모습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또한 수정 화주는 일종의 볼록렌즈인데 솜 같은 곳에 화주를 통해 햇볕을 쪼이면 불이 붙는다고 합니다. 일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데 그시대 일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신기한 물건이었을까요. 선덕여왕의 화주는 신라 3보의 하나인데 수정 화주가 그것이 아닌가 하여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네요.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는데 저도 아직 보진 못했습니다.
6> 다른 건 다 몰라도 모전석탑, 이것만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유적입니다. 그래서 국보 30호로 지정해 보호 관리하고 있습니다.
탑은 대체로 목탑에서 전탑, 그리고 석탑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전탑에서 석탑으로 가기 전 모전석탑이란 독특한 형태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건 아마 돌이 워낙 흔한 우리나라의 자연적 환경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전탑은 흙을 벽돌 모양으로 구워 만든 탑이고,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탑을 말합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입니다. 아닙니다 목조탑은 있을 수 없으니 국내 최고 오래된 탑이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네요.
널찍한 1 단 기단 위 네모 퉁이에 돌사자상을 한 개씩 놓았고, 1층 몸돌을 크게 하여 감실을 만들고 양옆으로 인왕상을 만들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감실은 문을 만들었는데 감 실안에는 아마 불상을 모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원래 7층 혹은 9층인데 임진왜란 때 부서졌다가 수리 후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습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약 15m~17m 정도의 높이로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 외 분황사 내에는 여러 유적들이 있지만 선덕여왕과 모전석탑 정도만 기억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사실 여왕의 재위 기간이 언제이고, 몇 년도에 분황사를 만들었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삼국통일 전에 분황사가 조성되었다 정도만 알아도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직접 방문하시면 해설사들에게 깊이 있게 설명을 듣고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가을에 분황사에 가시면 고목들의 단풍이 아주 좋습니다. 사찰 앞 넓은 들에는 꽃밭이 잘 조성되어 있답니다.
저는 경주를 구경 갈 때에는 항상 신라시대로 갔다는 상상을 합니다. 분황사에서 모전석탑을 돌고 있는 원숙한 여왕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첨성대에 올라 별자리를 보는 상상도 하며, 왕이 죽어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상상해 봅니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경주에 갈 때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경주에 자주 오셔서, 사랑의 화신, 신라 최고의 팜므파탈 미실도 되어보시고, 사내중의 사내 신라 최고의 꽃미남 사다함도 되는 상상을 해보시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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