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라의 역사 유적

저녁놀이 아름다운 진평왕릉, 가을이면 불심은 더욱 타오르고

300x250

진평왕은 신라 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년에서 632년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신라왕으로는 드물게 약 50년 동안 재위하였어요. 긴 재위 기간만큼 나라 안팎으로 복잡 다난한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진평왕의 능과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진평왕릉. 

 

진평왕릉은 경주(서라벌) 벌판 동쪽 끝, 명활산 아래에 있어요. 흔히 보문 뜰이라고도 하는데 경주시내에서 알천(북천)을 따라 보문단지로 가다가 우측 보문 마을 진입로를 따라가시면  마을 서측에 있습니다.

 

보문마을 앞 넓은 서라벌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자리잡은 진평왕릉

 

 능은 좀 규모가 큰 편이며, 능 주변의 특별한 치장이니 장식은 없어요. 상석과 표지석 정도가 있고 능 둘레에 괴석(보호석)이 간혹 보이는데 봉분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괴석을 둘러놓았습니다. 일부만 보이는 것은 흘러내린 흙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평왕릉은 그동안 경주시내  궁궐 가까이 능을 만든 평지형 능에서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산지형으로 바뀌어가는 중간 형태의 양식으로 생각됩니다. 통일신라 이후 왕들의 능들은 궁궐과 멀리 떨어진 산으로 능들을 만들게 되지요.

능에서 남쪽으로는 훤히 트여있고, 가운데는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넓은 벌판과 옛 서라벌의 궁궐, 황룡사, 분황사 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너무나 평범한 모습인데 유홍준 교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꼭 집어서 이곳을 경주에 가서 꼭 보아야 할 세 곳 중 하나라고 극찬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의 진평왕릉

 그건 아마 능 주변의 고목들과 어우러진, 능에서 본 해 질 무렵의 노을이 너무 좋아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기울어져가는 석양과 영화스러웠던 옛 서라벌의 모습이 대비가 되어서 오는 감정일 수도 있고요. 오래전부터 사진작가들의 핫스폿이 창림사지 삼층석탑이나 미탄사지 삼층석탑이 들어간 경주의 노을 모습을 찍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곳 진평왕릉에서의 노을 모습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우면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그랬듯이 말이에요. 저만 그런가요. ㅎㅎㅎ

 

 

 

2> 진평왕의 복잡한 가계도와 성골남진의 왕위 계승

 

진흥왕의 가계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주아주 복잡하지만 가장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든 왕들의 재위 기간이나 업적을 알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몇 명에 관한 것만 알아도 신라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내물왕인데 아주 중요합니다. 402년까지 왕위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물왕의 재위 기간은 4C 후반이 되겠네요. 이때부터 김씨들이 왕위를 계속 이어 갑니다. 이후 실성, 눌지 자비 소지왕 100여년을 흘러 정확히 500년부터 지증왕이 재위하는데 6C 초가 됩니다. 지증왕 500년은 꼭 기억해 주세요.

복잡한 진평왕의 가계도

 정확히 500년에 왕위에 오르는 지증왕 때부터 서서히 나라의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다음 왕인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완전히  명실상부한 국가의 기틀을 잡고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법흥왕은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은 없이 딸 지소를 낳게 되는데 지소가 아버지의 동생 즉 삼촌인 입종과 결혼하여 신라 최대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이 탄생합니다. 진흥왕은 동륜과 사륜(진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동륜태자는 일찍 죽고 사륜이 진지왕이 되지만 곧바로 폐위가 되어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이 왕이 되니 진평왕입니다. 이후 왕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선덕, 진덕여왕으로 이어지게 되고 진덕여왕 이후 성골이 더 이상 없어서(성골남진)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자인 김춘추가 왕에 오르니 태종 무열왕이 됩니다. 진평왕에 대하여 간단히 하여야 되는데 욕심이 생겨 말이 자꾸 길어지네요.

 

3> 오랜 재위 기간 내우외환, 착실하게 통일의 기반을 닦다.

 

진평왕은 진지왕의 폐위로 10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신라 최대 기간인 53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신체가 장대하여 11척이나 되고 풍채가 대단해 대궐의 계단돌이 깨어질 정도라 하네요. 신라는 6C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의 연이은 강력한 왕들로 인해 나라가 안정되고 국토가 확장되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특히 한강유역의 고구려, 백제의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선진문물을 도입하는 통로를 확보하였지만, 이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지요. 이에 진평왕은 김용춘, 김서현, 김후직, 의상 등 훌륭한 인재와 많은 화랑들의 출현으로 나름 훌륭히 극복해 내지요. 이런 인재 등용과 나라의 어려움에 나서는 분위기는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됩니다. 

 진평왕릉에서 바라본 옛 서라벌 왕궁과 황룡사 방향 모습

4> 불교를 너무나 사랑한 선대왕들과 진평왕

 

 진평왕은 신라를 불국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아니 그전 법흥왕 진흥왕 때부터 그래 왔는지 모릅니다. 특히 할아버지인 신라 최고의 정복왕인 진흥왕은 자신의 아들들을 전륜성왕인 금륜, 사륜으로 지었어요. 또한 가족들의 이름을 석가모니 집안의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진평왕 자신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으로 하고, 왕비를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인 마야부인으로 칭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동생들을 백반, 국반으로하여 석모니의 삼촌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선덕여왕이 되는 딸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누이의 이름을 따서 덕만으로 지었습니다. 자기 가족을 석가모니의 가족과 동일시 하였지요. 그렇지만 진평왕은 딸부자라 불행히도 석가모니 이름을 붙여줄 아들을 갖지 못했습니다.  김석가모니왕이 생길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5> 전륜성왕이 되고픈 신라의 왕들

 

 진평왕의 아버지는 금륜 태자이고, 그 동생인 폐위된 진지왕의 이름은 사륜인데, 이는 전륜성왕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원래는 네 명의 전륜성왕이 있는데, 전륜성왕이란 불법으로 세상을 평정한다고 예언된 왕이에요. 즉 쉽게 말해 정복왕이란 뜻이지요. 불교에서 륜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윤회를 뜻하기도 하고, 수레의 바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전륜성왕은 수레를 타고 갈 수 있는 모든 땅이 왕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고대의 자칭 전륜성왕이 두 명 있는데,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이지요. 진흥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은 나름 대단한 정복왕이었고, 성왕의 이름은 전륜성왕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5> 신라의 보물 진평왕 천사옥대

 진평왕이 천사에게서 받은 옥대로서 상제가 내린 하사품이라고 합니다. 왕은 조상이나 하늘에 제사 지낼 때 항상 착용했다고 합니다. 워낙 귀한 보물이라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장륙존상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보물로 여겨졌으나 신라가 고려에 멸망 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받쳤다고 합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과 정면의 황복사지

 진평왕릉을 소개하면서 얘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진평왕의 재위 기간이 53년이란 긴 시간이라 많은 사건과 이야기, 인물들이 등장하여 줄여도 아직 남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진평왕릉은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이점이 오히려 호젓하게 옛 정취를 느끼기엔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간혹 웨딩 촬영하시는 예비 신혼부부들도 계시고, 가족동반 나들이 오신 분들도 고목 밑에서 돗자리 깔고 노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진평왕릉에 오셔서 고목 밑 벤치에 앉아 옛 서라벌 풍경을 멀리서 한번 상상해 보세요. 혹시 모르자나요. 유홍준 교수가 느끼고 본 그 감동을 우리도 느낄 수 있을는지....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