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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신라사회를 지탱하는 철저한 신분제도인 골품제와 화백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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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지배계층 및 사회를 이해하는데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그중에서 화백회의, 골품제, 화랑제도 그리고 불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네 가지만 공부하여도 신라사회를 좀 더 잘 알 수 있어요. 오늘은 화백회의와 골품제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추후에 별도로 하나씩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화백회의

 

화백회의는 국가 중대사에 대한 귀족들의 협의체입니다. 고대 사로의 부족장 회의인 남당 제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진골 출신의 귀족들의 모임으로 의장은 상대등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은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야 안건이 통과된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왕권을 견제할 수있을 정도로 강력하였습니다. 25대 진지왕의 경우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서 폐위를 결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어요. 또한 각 귀족들을 서로 견제할수 있는 기능도 있었어요. 특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경우, 긍정적 협의를 이끌어내었을 때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2> 바꿀 수 없는 철저한 신분사회 신라, 골제+두품제 = 골품제

 

 골품제는 골제와 두품 제로 나뉘는데, 골제는 부모 양쪽이 왕족이면 성골, 즉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이고, 어느 한쪽만 왕족이면 진골이라고 하는데 왕이 될 수 없는 왕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같은 왕족이면서 성골과 진골로 나누어지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골제 성골 --- 부모 모두 왕족

       진골 --- 부모 한 명만 왕족

 

그리고 두품제는 성골과 진골의 왕족 아래 신분의 등급을 정하는 것으로 6두품에서 1두품으로 나누는데 4두품까지는 귀족이고 그아래는 평민 계급입니다. 그래서 크게 8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신라가 영토를 넓히면서 생겨난 지방호족들을 중앙에 편입시키면서 생겨난 제도이지요.

두품제 귀족 ---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 3두품 2두품 1두품

 

이러한 골제와 두품제에 따라 관직은 물론 혼인이나 가옥의 규모, 의복 색깔, 우마차의 크기와 장식 등 모든 부분에 차이를 두었어요. 부모에 따라 정해지는 신분은 평생 바꿀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신분제도는 세습되어지고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나름 철저히 지켜집니다. 한국판 카스트제도라고나 할까요.                                                       

 

3> 신분 극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골품제에 묶여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나도 관등이나 신분의 상승에 가장 제약을 많이 받은 계층은 6두품이었어요.  6두품을 "득난"이라고도 하는데 골품제에서 성골, 진골 다음가는 귀족 신분이지만 관등 관직의 제약으로 자기들의 능력이나 뜻을 펼칠 수가 없었지요. 행정이든지, 군사 부분이든지 나라의 모든 윗부분은 성골과 진골, 즉 왕족들이 다 차지하였어요. 요즘 말로 "즈그들끼리 다해먹는 더러운 세상" 그 이상이 아녔을까요.

 간혹 혼인이나 전쟁에서의 희생이나 공로로 인해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었지요.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 가문입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진흥왕의 딸 아양 공주와 결혼했어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왕족인 만 명과 결혼하고, 동생들인 문희, 보희, 정희 세 자매가 모두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혼인을 했어요. 이것을 보면 김유신 가문에서 얼마나 왕족들과의 결혼을 위해 애썼는가를 알 수 있어요.  또한 김무력부터 김유신 그리고 자손들까지 신라를 지키는 전쟁에는 항상 선두에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 신분의 상승과 신분 하락 방지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4> 신라 하대 골품제의 폐해와 무너지는 신라

 

  삼국통일 후 신문왕이  진골 왕족의 견제를 위해 국학을 설치하고 6두품을 등용하여 학문적, 정치적 조언을 구하 하는 시기도 있었지요. 하지만 나라가 평안해질수록 왕족들은 할일없이 관직만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에 뛰어난 6두품들은 하나 둘 신라를 떠나갑니다. 최치원처럼 전국으로 유랑하는 이도 있고, 최언위 최승우처럼 지방 호족세력인 왕건과  견훤의 휘하에 들어가 신라에 반기를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신라사회의 두 축인 화백회의와 골품제에 대해서 공부해 보았습니다. 특히 성골과 진골에 관한 여러 가지 얘깃거리가 많습니다.  혼인으로 엮어진 그들만의 리그랄까 

 아무튼 지금도 "인사가 만사다"란 말이 많이 쓰고 있습니다. 천년의 신라가 또 천년을 갈 수야 없었겠지만, 훌륭한 인재들을 잘 활용하였다면 아마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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