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일까, 가족도 지키지 못한 루저인가, 아니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의리남인가?
우리는 어릴때부터 역사공부를 할 때 신라 때 박제상이란 충신에 대해 배워 잘 알고 있지요. 우리나라 대표적인 충신의 표상이기도 하고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왕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의 모범으로 어릴 적부터 우린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좀더 이성적으로 사고할 나이가 되었을 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무모하고 용맹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 동기가 궁금해지네요. 왕의 동생 한 명을 구한 것만 해도 대단하게 칭찬받을 일인데, 왜국으로 가면 분명 살아오지 못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더구나 부인과 세 딸까지 둔 가장이며, 한때 실성왕의 사위이기도 한 신라의 최상위 귀족계급으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두가지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는 그때의 신라 상황이고, 두 번째는 왕들과 박제상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1> 허약한 신라, 확립되지 못한 왕권
그당시 신라는 국력이 아주 미약한 편이었어요. 위로는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이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침입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어요. 내부적으로는 박 씨와 석 씨에 이어 김 씨(내물왕부터)들이 드디어 왕위를 이어가게 되는데 김 씨 왕 초기라 왕권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물왕부터 실성왕, 눌지왕 그리고 자비왕이 왕위를 이어 가는데 중요한 것만 기억하기로 해요. 내물왕은 재위 기간이 356년~402년으로 이때부터 김 씨들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재위 기간 마지막 해인 402년은 꼭 기억해두기로 해요. 그러면 내물왕의 시대는 4C 후반이고 실성왕, 눌지왕은 대충 5C 초반으로 재위 기간이 되니깐 402년과 내물왕을 기억해두면 신라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신라의 고분 편)
2> 김 씨 왕들의 세습과 복잡한 가계도
그리고 먼저 전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재상과 그 부인의 가계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박제상의 행동을 이해해 볼 수 있고, 삼화목 치술령의 지명과 망부석과 관련된 설화와 왜 우리가 아직도 치술 신모를 사당에 모시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의 가계도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화랑세기 등 이제까지 밝혀진 역사서를 근거로 한 일반적인 해석이니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뭐 학자도 아니고 굳이 깊이 있게 다룰수준도 아니니 흥미위주로 가볍게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김 씨들이 역사서 처음 나타난것은 석탈해왕 때 부터인것 같아요. 김알지 탄생설화가 석탈해왕 9년에 계림에 김알지가 출현하므로써 김씨들이 역사에 등장하니까요. 김알지를 시조로 몇 대를 지나 구도에 이르고, 구도의 세 아들 중에서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13대 미추왕입니다. 최초의 김씨 왕, 미추 이후 14대, 15대, 16대는 석 씨들이 왕위를 오르고, 17대에 이르러 미추왕의 동생 김말구의 아들인 내물이 왕이 되었어요.
3> 원한은 원한을 낳고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던 내물왕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백제, 가야, 왜의 침입을 물리쳤지만 고구려의 거의 속국이 되다시피 하였지요. 이에 고구려의 요구로 볼모를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미추왕의 동생 대서지의 아들이자, 자기의 사촌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어요. 그 후 내물이 죽자, 실성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18대 왕이 되었고, 자기를 볼모로 보낸 원한으로 먼저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를 고구려로, 셋째 미사흔을 왜국과 화친한다는 빌미로 왜에 볼모로 보냈어요. 그후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를 또 고구려로 보냈지만 오히려 고구려가 그의 범상함을 알고 돌려보내어, 눌지는 신라로 돌아와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지요. 정말 원한이 원한을 낳았네요. 가까운 친척인데도 말이에요.
4> 왕에 충성할 것인가, 가족을 지킬 것인가
눌지왕의 부탁으로 고구려와 왜에 가서 왕의 동생들을 구하고 박제상이 왜에서 장렬하게 죽은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나는 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는 박제상의 말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그런데, 박제상은 시조 혁거세의 자손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한때 실성왕의 사위이기도 하며 눌지왕이 실성왕의 큰딸 아로와 결혼했기에 사사로이는 눌지왕과는 동서지간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는 줄 알면서도 흔쾌히 왜국으로 가는 것은 왕의 대한 충성심 하나로만을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놀라운 반전은 눌지왕은 원래 왕비 아로의 동생, 치술을 더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아로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어요. 집안일이라 왕실의 의견대로 할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박제상이 그위험한 타국에 가서 동생들을 구해오면 좋고, 아니면 실패하여 박제상이 죽으면 그 또한 치술을 얻을 수 있으니 좋고 이래저래 눌지왕 입장에서는 꽃놀이패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박제상 입장에서도 어렴풋이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을 듯싶네요. 더구나 장인 실성왕이 눌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상황이라 자신도 어느 정도는 제거 목록에 올라있을 수 있다고 미루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박제상은 왕과 다른 신하들의 요구를 거절하여 못 간다고 할 수도 없었지요. 거절할 경우 자기와 가족들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역사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박제상의 왕에 대한 충성심만을 부각하여 기술하였지요. 자 봐라 박제상 같은 충성심을 가져야 된다고, 본받아야 된다고 가르치지요.
5>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는 비련의 주인공, 치술 공주
제상이 왜국으로 가서 미사흔을 구해내고 본인은 불에 태워져 죽었다는 소식이 신라에 전해졌어요.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제상의 벼슬을 추존하고, 치술과 가족들에게 상을 내리며 크게 위로하고, 치술에게는 "국대 부인"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칭호를 내리고 궁에 들어와 살게 했다고 해요. 결국은 눌지왕과의 사이에 황아라는 딸도 낳게 되지요.
이런 사정을 본다면 치술의 운명은 본인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었는 것 같아요. 눌지왕은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 원수이고, 남편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며, 언니의 남편 즉 형부에게 다시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 치욕을 안겨준 사람이지요. 세 딸과 든든한 남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왕족인데도 불구하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6> 치술령의 망부석 그리고 벌지지
이런 치술의 안타까운 마음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치술령이라는 지명과 그 치술령의 정상에 있는 망부석입니다. 남산 남쪽 울주군과의 경계에 있어요. 치술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올랐다는 고개를 치술령이라 하는데 동해바다와 울산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고 합니다. 또 남편을 향한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이 한이 되어 망부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제상의 처가 치술 신모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도 치술을 신모로 모시는 사당이 여러 군데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천왕 사지 남쪽 망덕사 옆의 벌판을 장사 벌지지라고 하는데 그때에 긴 모래밭이 있었고, 치술이 떠나는 남편을 따라가다가 드러누워 통곡하던 곳인데 친척들이 와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다리를 뻗쳐서 일어나지 않으려 했다고 해서 벌지지라고 한답니다.
7> 왕은 치술의 아버지다. 아무도 연계하지 못한 사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여러 군데 나옵니다. 박제상에 관한 것은 박제상조에 별도록 기록될 정도로 많이 구체적으로 쓰여 있어요. 하지만 박제상의 부인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도 잘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실성왕편에서 "왕은 치술의 아버지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몰랐어요. 치술 신모, 치술령의 치술이 실성왕의 딸인지,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인지도 연결 짓지 못했지요.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 공주이고, 실성왕의 딸이라는 언급이 나오므로해서 모든 게 명확하게 연결 지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역사는 꾸준히 연구하여야 되는가 봅니다.
박제상은 자의든 타의든 우리나라 대표적 충신으로 기록되어 아직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지요. 치술 또한 많은 유적과 치술신모사에 모셔져 우리들의 추앙을 받고 있어요. 그녀의 기구한 운명과 인생을 후대에 어느 정도 남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박제상만이 아닌 치술 공주의 입장에서 역사를 한 번쯤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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