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에 소재하고 있어요. 7번 국도를 따라 불국사역에서 울산 방면으로 가다가 좌측 편에 있습니다. 원성왕은 역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신라 하대의 중요한 변곡점을 이루는 시대입니다. 재위 기간은 785년에서 798년으로 8C후반 마지막 왕이고, 나라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원성왕릉과 원성왕에 대하여 나름 상세히 알아볼까 합니다.
왕릉의 아름다움과 왕릉 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원성왕릉(괘릉)
남향의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은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중 가장 전형적인 무덤양식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능을 구성하는 부속물 하나하나가 예술적이며, 주변 경관과 어울려 최고의 능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능역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이 능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모양새입니다.
1> 능의 부속 석물
맨 앞에는 능의 능역을 알리는 화표석이 있는데, 이곳은 왕릉이며 영혼이 머무는 구역이라는 표시입니다.
능 입구 양쪽에는 먼저 무인상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무인상이라기보다는 서역인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의 통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이어져온 꼬부랑 턱수염에 우락부락 험상 굿은 얼굴, 터번을 쓴 듯한 모자. 하지만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두번째로 문인상 한쌍은 두 손을 읍하는 양 서로 반대편 소매 안에 넣고 공손하고 듬직하며 과묵한 인상이네요. 옷의 주름이 유려하게 늘어진 모양을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복식의 뒷면까지 표시되어 있어서 그 시대의 복식 연구에 많은 참고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그다음은 네마리의 사자상이 있는데,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두 마리는 고개를 돌려서, 동서남북을 경계하도록 절묘하게 표현은 신라인의 익살과 재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2> 능침
능 바로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죽은 영혼이 노는 곳이라 하고, 이곳부터 능침 지역이라 합니다.
봉분은 원형 봉토분으로 규모가 큰 편입니다. 봉분 밑둘레를 지대석으로 깔고, 그위에 판석(면석)으로 두르고, 그 사이사이에 탱석을 끼워 넣었지요. 그리고 그위를 둘레석을 얹어서 봉토가 무너지지 않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틀어 호석 또는 보호석이라 합니다. 탱석에는 방위에 맞추어 12 지신상을 새겼는데, 섬세하게 표현된 것이 아직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봉분 바깥 둘레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사이를 관석을 정교하게 끼워 넣었어요. 회랑처럼 보이기도 하고, 울타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난간석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호석과 난간석 사이에 있는 바닥돌을 박석이라 하지요.
3> 괘릉, 수로를 만들다.
무덤 뒤에는 석축을 쌓아서 흙이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게 하였고, 석축 바닥에는 물이 흘러가는 수로를 만들어 놓았네요.
원성왕릉 터는 원래 원성왕의 외가 쪽에서 건립한 곡사라는 절이 있었어요. 절의 터가 좋았는지 원성왕이 죽자 곡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능을 만들려고 땅을 파보니 물이 너무 많이 흘러나와 어쩔 수 없이 널을 걸어서 안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걸 괘"자를 써서 괘릉이란 별칭을 얻었다고 해요. 여기 주소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이니 약 천이백 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지명으로 남아 있네요.
4> 왕릉 외형의 변화
고분의 외형은 주로 호석의 모양이나 축조 방식, 지대석의 유무, 난간석의 유무 그리고 부속 석조물의 종류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고 발전단계를 가늠해 볼 수 있어요. 여기서 호석이란 봉분의 봉토가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돌로 만든 장치입니다.
오릉 ~ 발굴하지 않아서 구조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적석목곽분 ~ 고분들은 호석이 없거나, 혹은 굵은 돌을 봉분 둘레에 놓아두는 형식입니다.
태종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 크고 작은 돌들을 섞어 봉분 둘레를 일정한 높이로 둘러싼 형태입니다. 태종 무열왕릉의 경우 봉토의 흙이 흘러 내려서 일부만 노출된 상태이지요. 호석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워요.
신문왕릉 ~ 한 단계 발전한 형태로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들로 석축을 쌓고, 그위에 갑석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이석 축(호석)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삼각형의 지대석으로 덧대였습니다. 즉 봉분을 2중으로 보강하였네요.
경덕왕릉 ~ 봉분 둘레 탱석에 12 지신상이 처음으로 세겨져 있어요. 난간석도 최초로 등장한 왕릉입니다. 능 자체가 조금더 화려해 보입니다. 기타 석조물은 보이지 않네요. 12지신은 원래 중국에서 방위와 시간의 개념으로 쓰이는데 우리나라에 와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찰의 사천왕이나 금강역사가 부처를 지키는 의미 이듯, 왕릉을 지키는 의미로 12지신을 사용하였네요.
성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 12지신상이 있는 보호석, 그리고 난간석 외에 다양한 석조물들이 배치되었어요. 화표석, 무인상, 문인상 그리고 돌사자(석수) 등 좀 더 화려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화표석은 왕릉의 시작, 즉 영역을 나타내는 돌기둥입니다. 사찰의 당간(지주)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이로써 왕릉의 전형적인, 완성도 높은 양식을 구현함으로써, 신라의 왕릉 형식이 고려 및 조선의 왕릉 형성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원성왕릉은 제대로 된 양식을 갖춘 왕릉으로 역사적으로 흥덕왕릉과 함께 아주 중요한 문화재 입니다. 그래서 왕릉 외형의 발전단계를 짚어보는 것이 좋을듯하여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원성왕에 관한 내용도 같이 다룰려고 했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 졌습니다.
원성왕의 왕위를 이어받고, 물려주는데 있어서 다양한 얘기,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이 있지요. 또한 원성왕 이후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혼란의 신라하대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원성왕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는것이 좋을듯하여 다음편에서 별도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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