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원성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하대의 시작을 알리는 왕으로 785년~798년까지 약 13년간의 재위 하였어요. 이후 신라는 내부권력 다툼으로 인해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내물왕계로서 왕위에 오른 연유와 그 시대상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하대 전제왕권의 쇠퇴
신라가 삼국통일후 문무왕, 신문왕을 거치면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전제왕권을 강화하였어요. 그리고 성덕왕, 경덕왕 시대를 거치면서 통일신라 최고의 문화 황금기를 이루었어요. 하지만 경덕왕 이후 혜공왕이 8세에 등극하며, 그동안 전제왕권의 모순이 한꺼번에 나타나면서, 귀족들의 불만과 반란이 계속됩니다.
왕족 및 귀족세력의 득세
이는 아마 전제왕권을 유지하려는 왕권파와 예전의 자기들의 권력을 회복한 근친귀족들의 권력 분쟁이 극에 도달한것 같습니다. 무열왕계의 마지막왕인 혜공왕이 나이 어리고, 무능력하며, 여성스런 행동에 여러번의 반란이 일어 나지요. 그후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3개월간 궁을 에워싸고 혜공왕을 억류하고 있을때, 나중에 선덕왕이 되는 김양상과, 오늘의 주인공 김경신 즉 원성왕 등이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혜공왕과 왕비를 죽여버립니다. 삼국사기는 살해의 주체를 밝히지않고 있으나 삼국유사는 김양상과 김경신 등으로 지정하여 기록하였어요.
이는 김지정의 난이 친위쿠테타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추론할수 있어요. 왕실 근친귀족세력의 힘이 너무 많아서 왕의 힘이 미약해지므로 김지정이 그 세력을 억누르기위하여 난을 일으켰을거라는 주장이에요. 왜냐하면 김지정이 난을 일으켜 3개월 동안이나 왕과 왕비를 즉시 해우지않고 억류한것이나, 난을 진압한 김양상등이 왕과 왕비를 바로 없애고 자기들이 왕이 된것을 볼때 그렇게 생각해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원성왕계의 왕위세습과 신라하대의 시작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후 헤공왕을 이어 반란진압의 주역인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선덕왕 입니다. 선덕왕이 5년의 재위기간으로 자손이 없이 죽자, 반란 진압에 큰 역할을 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38대 원성왕 입니다.
원성왕의 왕위 계승 운명인가, 우연인가
원성왕이 왕위를 오를 때 유명한 설화가 있어요. 원래 선덕왕이 병환으로 누워 있을때, 왕실내부에서는 승계순위가 가장 앞서는 무열왕계 김주원이 사실상 내정된 단계였어요. 그런데 선덕왕이 죽었을때 큰비로 인해 알천(북천)이 범람해 김주원은 알천 북쪽 20여리에 있은터라 북천을 건너 궁궐로 올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차순위인 김경신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는 주위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를수 있었습니다.
글쎄요.
북천의 범람은 기록에 자주있는 일이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혜공왕을 시해하고 함께 난을 진압한 입장에서 보면 선덕왕과 원성왕은 이미 자기들끼리의 모종의 밀약이 있지않았을까요. 국가의 왕권을 전부 장악한 이들이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정권을 쉽게 내줄수는 없었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왕이 병환으로 오늘 내일 하는데 왕위승계 1순위가 궁궐을 떠나 접근조차 못하는 상황을 우연이라하기 보다는 무슨 연유가 있었는것 같아요.
왕실근친 세력들간의 왕위다툼의 시작
원성왕 이후 신라하대는 왕실근친간의 골육상잔의 왕권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사촌끼리 아니면 육촌끼리 서로를 죽고 죽이는 왕위 쟁탈전이 끊임없이 계속 됩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라 할까요. 누구든 기회만 있으면 왕위를 찬탈할수 있다는 논리를 스스로 제공한 결과입니다.
더 큰 혼란의 씨앗, 명주군왕 김주원
원성왕은 특히 경쟁자였던 김주원의 원망을 무마하기 위하여 명주(강릉)군왕으로 책봉하였고, 그의 아들 김헌창을 중용했지만, 이후 완전히 권력에서 밀려난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김헌창이 반란으로 죽은후 김헌창아들 김양이 장보고를 부추겨 왕실을 뒤흔들면서 신라는 더이상 돌이킬수 없는 상황이 되지요.
원성왕계가 집권한 이후 약 150년 동안 20명의 왕들이 있었으나, 평균재위 기간이 7.5년밖에 안되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수가 있지요.
원성왕의 치적
진골귀족들을 견제하기위하여 한국역사 최초로 유교 지식에 대한 시험을 치러 인재를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어요. 이는 훗날 고려 광종때 시작한 과거제도의 전신이 됩니다. 요것만 기억.
과분한 대접을 받은 원성왕
원성왕의 묘호는 열조이고, 시호는 원성대왕 입니다. 사실 신라에서 묘호를 받은 이는 세사람인데, 역사기록에 나오는 김씨의 시조로 나오는 '태조 성한왕',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태종 무열왕입니다. 다소 의문이 들긴하는데 원성왕도 열조라는 묘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래 원성왕릉 자리에 곡사가 있었는데, 원성왕에게 능의 자리로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이름을 숭복사로 바꾸었어요. 그리고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위한 황실 원찰로 만들었습니다. 이절에 최치원이 작성한 초월산 숭복사 비문이 있는데, 이비문에 원성왕에게 열조라는 묘호를 올린 신라 당대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왕위를 찬탈하고도 신라왕릉중 가장 격식을 갖춘 완벽한 왕릉에 묻힌걸 보면 전생에 아마 큰 덕을 쌓은것 같습니다.
원성왕의 치적은 크게 드러나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지만 원성왕 이후 신라하대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나름 눈여겨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8C 후반 마지막 왕, 신라 하대 혼란의 시대 첫번째왕, 그리고 독서삼품과를 설치한 왕 정도만 기억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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