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다 보면 한번쯤 '우리 민족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의문을 품을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고대 신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볼 때 더 그런 생각이 들지요. 특히 신라와 흉노의 관계에 대해 그동안 여러 학자 들이나 단체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명쾌하게 내린 결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하여 관련된 역사기록, 유적이나 유물을 살펴보겠습니다.
금석문에 나타나는 김씨와 흉노와의 관계
문무대왕 비문
문무대왕릉 비문에 '투후제천지윤 전칠엽' '15세손 성한왕'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투후는 흉노 왕자 출신의 김일제가 한무제로부터 하사 받은 직책을 말하며, 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전칠엽은 7대를 내려갔다는 뜻이고요. 15세손 성한왕은 문무왕이 성한왕의 15대손이다는 뜻이지요.
다른 비문 및 사서에는 모두 태조라는 묘호와 성한왕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문무왕의 김씨 가문은 흉노의 후예로서 투후 김일제에서 성한왕에 이르렀고, 성한왕이 김씨 가문을 세운 태조라는 뜻입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 비문
중국 당나라로 이주해 살았던 김씨부인 묘지명입니다. 신라 김씨의 유래는 중국 전설 속의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로부터 투후 김일제를 거쳐서 신라의 김씨로 이어졌다는 기록입니다.
흥덕대왕 비문, 김인문의 묘 비문, 진철대사 탑비문, 진공대사 탑비문
성한왕이 나오는데 누구인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조, 진흥왕 순수비문
신라에서 사용하지 않는 묘호인 태조대왕을 언급하고 있지만 태조대왕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태조대왕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신라의 김씨들은 끊임없이 흉노는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미약한 출신을 미화하기 위하여 흉노의 왕족을 가져다 붙인것인지, 아니면 진짜 흉노족의 후예인지 알수는 없지만 수백년 동안 지속적으로 새기고, 적고 하는걸 보면 무슨 연유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신라의 유적 유물에 나타나는 기마유목민족의 흔적들
적석목곽분
예부터 무덤과 관련된 장례문화는 잘 변하지 않지요. 그래서 장례문화는 민족 분류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라의 4C 초 ~ 6C 초에 갑자기 출현한 마립간 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신라의 왕릉 편에서 언급한 적석목곽분은 한반도 신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무덤양식입니다. 목곽 안에 시신 및 부장품을 넣고 돌을 쌓은 후 봉토를 덮은 모습입니다. 북쪽 유목민의 돌을 이용한 매장 방식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하여 별도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황금 숭배 사상
신라 고분들에서 금관을 비롯해 많은 황금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유목민족은 금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흉노족의 '제천 금인'은 금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낸다는 뜻으로 이런 풍습이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발원지라 여기는 알타이산의 '알타이'가 금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독 신라에서만, 특히 적석목곽분에서 황금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것은 유목민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신라 토우 기마인물형토기의 동복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상과 하인상에서는 말 잔등에 동복을 얹은 모습이 보입니다. 동복은 유목민의 이동시 지참하는 필수 생활용품이지요.
문화 풍속에서 나타나는 유목민과의 연관성
순장제도
신라 초기 순장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유목민에게 나타나는 풍습입니다.
편두 풍습
신라고분에서 발견되는 유골은 두개골이 납작한 편두의 형태를 나타내는데 이런 편두의 풍습은 흉노의 전형적인 풍습입니다.
거서간, 마립간
거서간은 흉노족의 왕호인 케세르칸에서 연유된 것으로 생각되며, 마립간은 삼국유사에 눌지에서 지증까지의 왕의 칭호로 사용하였는데, 우두머리 임금, 마리칸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형사 취수제, 근친혼
유목민 특히 흉노족에게 아버지나 형이 죽으면 친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첩이나, 형수를 거둬들인다는 것과, 근친혼의 풍습이 있는데 신라에서도 이런 근친혼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 토템 사상
모든 것에 신이 있고, 이 신들과의 소통을 무당을 매개체로 하는 무속신앙과 새를 신성시하는 토템 사상은 오늘날까지 무당이나 솟대 등을 통해 남아 있습니다. 몽골에서는 여러 가지 천조각을 줄에 걸어놓는 것을 '어와'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서낭당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외국 방송국의 주장
독일 ZDF 방송과 미국의 교육방송 Leaning TV 다큐멘터리에서는 4C,5C 게르만족을 대이동 시킨 훈족의 원류는 한국인일 가능성에 대해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요건 근거가 좀 약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만큼 흉노와 신라의 친연성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금을 사랑한 신라와 흉노(김씨의 나라, 금나라)
신라가 망한 뒤 80년 후 자신들 스스로 신라에서 온 김씨들의 후예라는 여진족들이 금나라를 세웁니다. '김나라'가 아니고 금나라입니다.
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도 김씨 성을 금씨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음양오행설에 근거해 이(李)씨의 목(木)이 김(金)씨의 금(金)에 진다고 하여 금씨를 김(金)씨로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위에 언급한 여러가지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화적 흔적들이 2000년전 중원의 강대국 한나라를 휘어잡던 흉노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홀연히 사라진 흉노가 한국 역사와 뭔가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인것 같습니다.
그럼 진짜 우리의 조상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삼국사기에서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지요.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6부에 나누어 살았다라고 명쾌하게 고조선의 후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후한서나 진서에는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던 진의 망명객이 들어오고, 나중에는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온 낙랑인들도 신라 땅에 살았다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박혁거세나 석탈해 그리고 김알지의 이주민세력까지 유입되지요. 이렇게 되면 신라의 정체성이, 아니 그후손인 우리의 정체성이 애매해지는 측면이 있네요.
오늘은 요쯤에서 의문을 가지는 정도로 끝내야될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조상들은 그렇게 구성되어 왔고, 그렇게 이제까지 살아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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