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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김흠돌의 반란, 통일 전쟁의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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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흠돌의 반란은 신문왕이 즉위할 때에 일어난 반란으로 이후 통일신라는 체제 정비를 통해 확고한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럼 오늘은 김흠돌의 반란이 일어난 배경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을 끝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혼란의 상황이 계속되고, 당나라 또한 언제든지 또다시 침략해 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무신 진골귀족들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요. 태종 무열왕이 진골로 왕이 되면서,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진골의 수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진골이면 누구나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왕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어요.

김흠돌 친인척
김흠돌 친인척 관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김흠돌

 김흠돌의 난을 이해할려면 먼저 김흠돌의 가계를 살펴보는 것이 제일 빠를 것 같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기존 사국유사와 삼국사기 그리고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의 기록들을 참조해 알아보겠습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동생 정희 소생이고, 김유신의 딸 진광과 결혼했으니 김유신은 김흠돌에게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이 됩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김흠돌의 최고 뒷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태종 무열왕의 왕비인 이모 문명왕후입니다. 조카인 흠돌을 무척 아꼈나 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관계로 인해 자기의 딸이 정명 태자(신문왕)의 태자비가 되었어요.

이는 신라왕가와 최고의 귀족인 김유신 집안 양대 가문을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화랑 세력까지 장악한 김흠돌

 화랑들은 항상 신라를 지키는 훌륭한 버팀목이었지요. 전쟁에 참가해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물론, 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화랑에서 나왔습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라 할만하지요.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김유신이 살아있을 때에는 어느 정도 통제가 되었지만 김유신 사후에는 김흠돌 중심의 가야 세력들이 화랑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27대 풍월주인 김흠돌은 26대 풍월주인 진공으로 부터 물려받았는데, 반란의 동참자 진공은 흠돌의 누나인 흠신과 결혼하여 흠돌의 매형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 후 왕권파인 오기와 원선이 잠깐 풍월주가 되지만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이후 풍월주는 사위 천관, 아들 흠언, 조카 신공이 이어받으면서 완전히 김흠돌의 사병화가 됩니다.

화랑은 원래 준군사조직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한명의 화랑 밑에 낭두, 낭도들이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을 거느립니다. 이런 화랑들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둔다는 것은 큰 힘이 되겠지요.  

 

비대해진 진골귀족에 대한 경계

 남부러울게 없던 김흠돌의 권력에 드디어 하나 둘 변수가 나타나게 됩니다. 통일된 더 크고 넓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왕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왕권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래서 문무왕은 진골귀족에 대한 견제와 왕권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서서히 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핵심은 인사이지요. 김흠돌의 사람들을 요직에서 제외하려고 합니다.

 

자식을 낳지못하는 태자비

김흠돌의 딸인 태자비 김 씨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어요. 또한 정명 태자도 태자비 김 씨를 아끼지 않았지요. 오히려 형 소명 태자비로 내정되었던 김흠운과 요석공주의 딸을 더 가까이합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신문왕의 왕비가 되는 신목 왕후입니다. 이에 흠돌은 더 불만이 쌓이게 되겠지요.

 

문명왕후의 죽음

그리고 그동안 김흠돌의 든든한 배경이었던 이모 문명왕후의 죽음은 김흠돌에게는 그동안 저지른 여러가지 죄가 많기에 불만을 넘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뭔가를 해야 할 시기가 되었지요.

 

반란의 시작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김흠돌은 문무왕이 드디어 병석에 눕자, 정명태자를 제치고 문무왕의 후비인 신광(김유신의 딸)의 소생 인명을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에 문무왕비 자의 왕후는 북원에 있는 오기 공(김대문의 아버지)을 불러 들어 왕실 호위를 맡기고, 서불한 진복을 동원합니다.

 이미 자의왕후와 정명 태자, 그리고 죽기 전의 문무왕은 예견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빨리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예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문무왕은 정명 태자에게 내가 죽거든 내 시신 앞에서 즉위하라고 유언을 할 정도로 김흠돌의 반란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흠돌, 진공, 흥원은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에워싸고 시위하였지만, 왕권파인 오기, 진공 등의 발 빠른 대처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지요.

 

결과

난을 진압한후 주동자는 모두 처형하고, 동조했거나 방조한 신하들은 대거 숙청해 버립니다. 그동안의 걸림돌들을 한 번에 해결해 버린 셈입니다. 단 김유신 가문의 방계는 정도에 따라 정리를 하였지만 직계가족은 그대로 유지했는 것 같습니다. 김유신의 아들 삼광은 신목 왕후를 궁궐로 데려오는 과정에도 나오고, 지소 부인에 대한 후한 대우도 역사서에 기록되는 걸 보면 김유신의 후광과 명성은 어찌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제까지의 화랑제도를 폐지해 버립니다. 남은 화랑들은 병부에 귀속시켜 화랑들을 다시는 사병화할수없게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과감하게 정리해 버리네요.

마지막으로 김흠돌의 딸, 왕비 김씨를 내쫓아버립니다.

 

 역사에 거론되는것보다는 훨씬 싱겁게 난이 끝나므로, 어떤 학자들은 반란을 조장했다거나, 방관하였다가 일거에 정리했다거나 여러 가지 설이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문무왕, 자의 왕후, 그리고 신문왕은 모든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를 동원하는 과정, 난을 처리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여튼 이 반란이 일어난후 신문왕은 과감한 개혁과 왕권강화 정책을 실시해 일사천리로 신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킵니다. 모든 분야에서 능숙하게 처리하는 신문왕은 완전히 준비된 왕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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