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독도를 우리에게 안겨준, 그래서 우리나라를 빛낸 100인 중 한 사람으로 뽑힌 신라 최고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이사부 장군에 대하여 공부해 보겠습니다. 신라가 주변의 소국들을 합병하고(지증왕,법흥왕), 최대의 영토로 확장하던 시기(진흥왕)에 활약한 장군이지만 워낙 사료가 부족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도 참조하여 나름 열심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왕족 출신의 이사부 장군
가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사부는 내물계로 복호에서 습보로 이어지고, 습보는 조생 부인과 결혼으로 지증왕과 선혜 공주 그리고 이사부의 아버지인 아진공을 낳게 됩니다. 이사부는 지증왕 법흥왕 그리고 진흥왕 시기에 활약하게 되는데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까지 참조하면 지증왕은 삼촌이며, 법흥왕은 사촌관계이지요. 진흥왕과는 부계로는 5촌 조카, 모계로는 한때 계부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남편 입종갈문왕이 죽은 후 영실과 결혼하고 이후 이사부와 부부관계가 되므로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의붓아들이 되는 관계입니다.
이사부장군이 사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 가야공격
실직성(삼척) 군주로 파견되기 전이니 아마 어릴 때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증왕 때 변경관리가 되어 거도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하는 것처럼 가야국을 속여서 빼앗았다'라는 삼국사기 이사부열전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거도'란 신라초기 장군으로, 신라에는 '마숙'이라는 말몰이행사를 일년에 한번하는데 마숙을 하는것처럼 주변국들 속여서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 일을 이사부가 따라 하여 가야를 공격한 일 말합니다. 어리지만 대담하고 지략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때 가야가 어느 지역의 가야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청년 군주의 탄생 국경수비대장
505년에 지증왕은 주, 군, 현의 제도를 시작했는데, 동해안 최북단에 실직주(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초대 군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때 군주라는 명칭이 처음 쓰였다고 합니다. 3대 왕을 거치며 활약한 이사부의 사서 기록을 보면 아마 이때 나이가 십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하여튼 어린 나이에 그것도 중요한 변경의 거점에 군주를 맡긴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요. 여기서 우리는 위에 언급한 왕족이기에 가능하고 , 가야를 공격한 공을 인정했거나, 가까이서 보았을 때 남다른 비범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나무 사자로 우산국을 정벌한 청년장군 이사부
지증왕 13년인 512년 이사부는 삼척보다 더 위쪽으로 개척한 하슬라(강릉) 군주로 임명되자마자 우산국 정벌을 시작합니다. 우산국 사람들이 바다에서 하도 날쌔고 용감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머리를 써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이용해 항복을 받아내고 해마다 조공을 받치게 하지요. 이로써 역사적으로 울릉도와 울릉도에서 보이는 독도를 영원히 우리 영토로 확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이 우산국 정벌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지하에 있는 이사부는 알까요. 만약 안다면, 뿌듯하고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때 이사부가 어디에서 출정했는지의 문제를 가지고 삼척과 강릉 지자체의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척의 정동쪽에 울릉도가 있고, 이사부가 강릉으로 가자마자 울릉도 정벌을 했는데 아마 삼척에서부터 준비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의견이 모아져 지금은 삼척이 출정 장소로 기정사실로 되었다고 합니다.
신라 최초의 수군으로 동남해 제해권 장악하여 왜구들이 소멸
이사부 장군이 수군을 동원해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그동안 신라는 수군이 제대로 편성되지 않아 동남해의 무역과 제해권 장악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가를 비롯해 수도 서라벌까지 여러번 위협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우산국 정벌을 계기로 이후 왜구의 침입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우산국을 놀라게 한 목제 사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지요. 사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사부는 사자의 존재를 알고, 생김새까지 알고 있을까요. 그것은 불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석가모니 부처를 지키는 사자의 역할과 상징성이 불경과 불상과 함께 도입이 되지요. 신라인 입장에서는 부처를 지키는 무시무시한 존재인 사자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면 될것 같습니다.
금관가야의 병합
법흥왕 시대에 신라는 여러 가야 소국을 압박하고 드디어 금관가야를 처음 공략하기에 이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금관가야 병합에 이사부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나 일본서기에는 군사를 직접 몰고 온 이사부가 이질부례란 이름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처음 금관가야 공략 후 3년 뒤에 금관가야 구해왕은 신라에 항복하게 됩니다. 철의 최고 생산지인 금관가야의 병합은 산업적으로, 군사적으로 신라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는데 큰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법흥왕은 상대등이란 최고 직책을 설치했는데, 이사부는 이에 거의 버금가는 높은 직책에 되었다고 합니다.
정치가로서 이사부 최고의 전성기
540년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이사부장군은 이때에는 정치가로서 활약을 하게 되지요. 지소태후 입장에서는 어린 아들을 위한 버팀목으로 군사부문에 큰 영향력이 있는 이사부를 요즘의 국방장관인 병부령에 임명합니다. 또한 임명 전인지 후인지 모르지만, 첫번째 남편 입종이 죽은 후 결혼한 영실과 헤어지고, 이사부를 남편으로 선택합니다. 이로서 이사부는 진흥왕이 18세가 되어 친정을 하기까지 지소 태후와 함께 신라 최고의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 국사 편찬 건의
이 시기인 진흥왕 6년에 이사부는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건의하게 되지요. 이에 진흥왕은 거칠부로 하여금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인 국사를 만들게 합니다. 하지만 현재 국사는 전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한강 진출 교두보 확보 단양 적성비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입으로 죽자, 백제는 고토 회복과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와 혈전을 벌이고 있었어요. 신라와는 신라가 가야를 은근히 압박하자 그동안의 나제 동맹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고요. 이때 한강 상류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치열한 전투로 두나라가 지쳐 있을때 신라의 이사부는 이 두 성을 빼앗고 성을 보강해 굳건히 방어를 하게 됩니다. 이사부의 지략으로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해 한경유역 장악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이 전투로 이지역을 차지한 기념으로 세워진 단양 적성비에 이사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요. 이후 거칠부와 신라의 장수들은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로서 중국과 직접 왕래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어 신라는 더욱 강성한 국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대가야 정벌
도살성, 금현성 전투 이후 진흥왕이 친히 정벌에 나서면서 이사부는 존재가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대신 거칠부, 김무력 등 새로운 세력들이 진흥왕을 도와 정복전쟁을 계속하지요.
이후 이사부가 마지막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진흥왕 23년(562년)에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킬 때입니다. 이사부는 함께 출정한 사다함을 비롯한 화랑들의 대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하였어요. 이에 가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낙동강 유역 및 남해안 일대의 가야 소국들은 12개국도 넘는 많은 국가들입니다. 항복하고 반란하고를 계속 반복하는데 이를 정리하는데 항상 이사부 장군이 있었지요. 사실 가야에게 있어서 이사부 장군은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사부 장군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에 편입시킨 동해수호와 해양 개척의 선구자였습니다. 또 신라의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영토를 넓힌 장군이고, 어린 진흥왕을 도와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는 등 훌륭한 정치가 이기도 하였어요. 이사부가 활약한 6C 초, 중엽 신라의 눈부신 발전은 이후 삼국통일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어요.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통일과정에서의 활약으로 과분한 대접을 받는데 비해, 이사부장군은 활약에 비해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고, 소홀히 대하지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이렇게 훌륭한 이사부 장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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