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더 잘 알려진 성덕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왕들과 다르게 성덕왕을 '성덕대왕'으로 부릅니다.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성덕대왕의 치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성덕대왕릉의 특징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선대 왕들의 탄탄한 기반
33대 성덕대왕은 이름 그대로 굉장한 덕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인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신문왕이 나라의 기반을 튼튼이 한 덕분에, 효소왕을 이은 성덕왕은 신라 최대의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지요. 사서의 기록에 출생에 관한 것은 없으나 효소왕처럼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8C초부터 약 35년간, 다른 왕들에 비교해 오랜 기간 재위하였습니다. 재위 초기 권신들에 의해 왕비를 폐위해 교체하는 등의 혼란도 잘 극복하였고, 여러 가지 재난들도 있었지만 나름 많은 노력으로 무난한 재위 기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덕왕의 치적
정전제 실시
성덕왕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민에게 법적으로 소유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는 의미의 정전제를 실시하였지요. 요거는 아주아주 중요합니다. 성덕왕은 이것만 기억해도 될 듯싶습니다.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경작지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므로 인해 농민들의 안정과 조세의 안정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지요.
당과의 외교관계 복원, 신라 발해와는 소원
그동안 나당전쟁으로 소원하던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고, 당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기도 하였지요. 이런 연유로 패강(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정하는 성과도 있었어요.
일본과는 서로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냉담한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특히 백제의 왕족들이 미야자키에 소국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신라군의 침입으로 멸망했다는 일본 기록이 있고, 이와 관련된 풍습이 아직도 해마다 치러진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이 300백 척의 병선으로 침입해 왔으나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의박사, 산박사 신설
의박사는 의사이고, 산박사는 수학자를 말합니다.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야이지요. 성덕왕이 이런 분야에 인재를 교육하고 양성함으로써 훗날 경덕왕의 여러 가지 찬란한 문화적 업적의 기초가 되지요. 석굴암이나 불국사의 배치나 구성에 수학적인 모형이 적용된 것은 아마 성덕왕의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황복사 삼층석탑에 아미타불상 봉안
효소왕과 모후인 신목왕후가 만든 황복사 삼층 석탑에 사리장엄구와 아미타불상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먼저 효소왕이 만든 아미타 불상과 함께 국보로 지정될 만큼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가 봅니다.
성덕왕릉
성덕왕은 죽은 후 이거사 남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는 7번 국도 울산방향으로 가다가 왼쪽 산기슭에 있습니다. 남서향의 릉은 보호석과 난간석, 그리고 부속 석물들이 잘 갖추어진 정형화된 최초의 왕릉이 됩니다.
신문왕릉과 비교해 같은 점은 보호석을 보강하는 직삼각형 지대석은 둘 다 있는 부분이지만, 그 외의 릉의 양식은 성덕왕릉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격식 있게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차이점을 살펴보면
1> 봉분을 둘러싼 보호석이 이때부터 치석(벽돌 모양)이 아닌 한 개의 판석과 한 개의 탱석으로 구성하였어요. 그래서 보호석이 단순 깔끔해졌습니다.
2> 난간석이 회랑처럼 봉분 전체에 둘러져 있습니다. 사찰의 회랑이나 집의 담장처럼 꾸며서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집처럼 느끼게 합니다.
3> 신라 왕릉에서는 최초로 12 지신상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얼굴은 12 지신 형상이고, 사람 몸 형상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모습입니다. 방위를 나타내는 12 지신을 독립된 형상으로 만들어 보호석과 난간석 사이에 배치(환조 형식)해 능의 위엄 있는 모습과 능의 보호 역할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불교에 있어서 수미산을 지키는 사천왕이나 금강역사처럼 12지신을 무덤을 지키는 모습으로 표현한것 같습니다.
4> 문인상과 무인상 각 한쌍식 배치하였습니다.
5> 돌사자를 봉분 동서남북에 한 마리씩 배치하였어요. 이것은 조금 뜬금없긴 하지요.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고, 본 적도 없는 사자를 돌 형상으로 배치한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요. 또 호랑이면 몰라도 ㅎㅎ. 이것 또한 불교의 영향이라 생각되네요. 분황사 모전석탑 네모서리에 사자상이 부처의 무덤인 탑을 지키듯이, 왕릉을 지키는 역할로 사자를 차용한 것 같습니다. 사자는 부처를 지키는 상징물이지요.
6> 비문 귀부
현재 비문과 이수는 사라져 버리고 귀부 부분만 남아있어요. 그것도 머리 부분은 잘려나간 채로. 힘차게 앞으로 나가려는듯한 귀부의 발부분이 인상 깊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라의 왕릉 양식은 유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요소가 뒤섞여있는 것 같습니다. 돌사자, 12 지신 상, 그리고 무인석 문인석의 배치 등 불교와 당나라의 영향이 골고루 섞여서 신라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같습니다. 역시 비빔밥 문화의 융합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간단히 호석(보호석)에 따른 무덤양식 변화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학자들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을 조금만 알고 답사를 가도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호석 - 괴석(다듬지 않은 돌). 서악동 고분군, 선덕 여왕릉
호석 - 괴석, 받침석(지대석) - 괴석. 무열왕릉, 진평왕릉
호석 - 치석(다듬은 돌), 지대석 - 치석. 신문왕릉
호석 - 면석+탱석, 12 지신 상(환조), 난간석. 성덕왕릉
호석 - 면석+탱석, 12 지신 상 탱석(부조) 난간석. 헌덕, 경덕, 원성(괘릉), 흥덕왕릉. 그리고 전진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 능지탑, 구정동 방형분 등
아무튼 성덕왕릉은 전체적인 모습은 전 단계보다 많이 발전된 양식인데, 현존하는 각종 부속물의 상태가 많이 훼손되고, 멸실되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예술적인 면에서는 이후 조성되는 괘릉 및 흥덕왕릉에 비해 조금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는 효소왕의 이른 죽음과 성덕왕의 즉위 과정의 의문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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