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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흥덕왕과 장화부인 사랑일 까 연민일까. 왜 이리 먼곳까지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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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라역사에 대해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부부사랑의 대명사 흥덕왕과 장화 부인, 그리고 사진 마니아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 흥덕왕릉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함께 흥덕왕릉의 숨은 역사를 찾아 한번 가볼까요.

 

왕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어래산 동쪽 기슭인 안강읍 육통리에 있습니다. 동남쪽으로 넓은 안강 뜰이 펼쳐진 양지바른 곳이지요. 정면 맞은편에는 조선시대 전통 양반마을인 양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대 다른 왕릉들과는 다르게 이곳은 왕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흥덕왕의 왕비인 장화 부인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2달 만에 숨을 거두게 되지요.  이후 약 10년이 흘러 흥덕왕도 유언으로 장화 부인과 합장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장화 부인의 능을 왜 굳이 이 먼 곳에 만들었을까요.

 

가족 간의 왕위찬탈

 이 의문을 알아보기 위하여는 먼저 가족사를 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선덕왕과 원성왕 때부터 신라하대의 시작인데, 이후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 갑니다.  원성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원성왕이 뒤늦게 왕이 되는 바람에 첫째 아들 김인겸, 둘째 아들 김의영은 차례로 태자에 오르지만 원성왕보다 먼저 죽었지요. 또한 셋째 아들 김예영도 마찬가지, 태자에 오르지도 못하고 세상을 뜹니다.

 따라서 이미 장성한 손자들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먼저 죽은 첫째아들 김인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첫째가 원성왕의 뒤를 이은 소성왕, 그리고 헌덕왕과 오늘의 주인공 흥덕왕 그리고 막내 김충 공입니다. 소성왕에게는 아들 둘, 딸 한 명이 있었지요. 첫째가 애장왕이고 둘째가 체명이며 막내가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장화 부인입니다. 말로서 하니 복잡한 것 같아도 그림으로 나타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흥덕왕 가계도
조카와 삼촌사이를 나타내는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가계도

 

 소성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하여 2년 만에 죽어서 아들 애장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초기에는 헌덕왕, 흥덕왕이 되는 삼촌 김언승과 김수종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년이 될 무렵부터 삼촌들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패기 있고 의욕적인 청년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으나, 끝내 헌덕왕에게 동생 체명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지요. 그리고 왕위는 최대의 암군인 삼촌 헌덕왕과 흥덕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가족관계와 왕위계승을 이야기하는 것은 헌덕왕과 장화 부인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장화 부인 입장에선 아버지가 왕다운 노릇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2년 만에 죽어버리고, 오빠 애장왕과 체명 모두 삼촌들에게 섭정을 당하다가 끝내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 하였지요.

 

사랑일까. 연민일까

 장화부인은 그때 아마도 헌덕왕 김수종에게 이미 시집간 상태였으리라 짐작됩니다. 늙은 삼촌과 결혼하는 것도 억울하고 슬픈 일인데, 그 삼촌이자 남편의 형제들이 자기의 오빠들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역사적인 문제는 생각과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장화 부인의 관점에서는 친정 가족들을 시해했거나 아니면 묵인, 방조한 남편이 무어 그리 좋을까 싶네요. 

 우리가 흔히 흥덕왕과 장화부인을 신라 최고의 금슬이 좋은 왕과 왕비로 생각하고, 흥덕왕을 최고의 로맨스 가이 어쩌고 저 쭈구 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앵무새와 관련된 얘기, 주변의 권유에도 왕비를 세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덕왕 혼자만의 연민이나 짝사랑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더군다나 역사기록 어디에도 장화 부인이 흥덕왕과 부부 금슬이 좋았다는 기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멀리 벗어나고싶은 장화 부인

  그리고 예전부터 가졌던 의문은 왕경 근처에도 왕비의 능 하나 정도는 쉽게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데, 왜 이리 먼 이곳, 안강까지 와서 능을 만들었을까요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짐작컨대 그건 아마 장화 부인이 그 피비린내 나는 왕경을 가능하면 멀리 떠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삼촌이 오빠를 둘씩이나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죽어서도 생각하기 싫어서 가능하면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흥덕왕릉 전경
완벽한 양식을 갖춘 흥덕왕릉

 

왕릉의 양식을 완비한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비편이 발견되고 여러 가지 기록상 정확히 능의 주인을 확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왕릉 중의 하나입니다. 능의 양식도 괘릉처럼 갖출 것 다 갖추고 있는 아주 전형적인 양식입니다. 이후 왕릉들은 신라하대의 혼란으로 제대로 된 왕릉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흥덕왕릉이 아마 마지막일 겁니다. 왕릉의 외형은 원성왕릉 편을 참고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흥덕왕의 치적

 특별한 치적은 없고, 이때에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어 대량 보급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사치를 법으로 규제하기도 하고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것도 흥덕왕이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해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활성화해 잠깐의 풍요도 가져왔지만 훗날 장보고가 신라 왕실의 왕위찬탈에 개입함으로써 신라하대 혼란과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굽은 소나무가 조상묘를 지킨다는 옛말이 맞네요

 흥덕왕릉은 삼릉 숲과 더불어 소나무가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사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한두 번쯤은 다녀가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여기 소나무는 한그루도 똑바로 자란 나무가 없지요. 굽은 소나무가 조상묘를 지킨다는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네요. 굵고 바르게 자란 나무는 쓰일 때가 많아서 가만히 놔두질 않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 소나무는 조상묘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진작가들에게는 작품의 영감을 주고,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힐링을 주는 효자중의 효자인 것 같습니다.

 

소나무와 문인상
굽은 소나무가 문인상과 더불어 묘를 지키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숫자를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몇 대왕이고 재위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사찰의 경우 몇 년에 만들었는지, 유물이 국보 몇 호로 지정되었는지 등 가능하면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숫자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숫자가 오히려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시선을 빼앗아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신라 초기, 중흥기, 통일기 그리고 가장 문화적으로 융성하던 시기, 혼란의 신라하대 등 이 정도만 구분해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순서를 알면 좋겠지만 우리가 단순히 유적,유물을 구경하고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구체적인 연도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국보가 몇호인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국보면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그냥 국보로 평가를 받을 만큼 훌륭한 문화재로 이해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몇 대 왕인지, 재위 기간이 라든지는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구체적으로 아시고 싶은 분은 인터넷을 참조해 공부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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