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동쪽 산자락 끝에 다소곳이 외롭게 서있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구황리 삼층석탑이라 했는데 발굴할 때에 황복 혹은 왕복이란 문양이 발견되고 사서에 낭산 동쪽에 황복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황복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황복사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황실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는 황실사찰 황복사
이곳 지명이 구황리 혹은 구황동이라 하는데 원래 '황'자가 들어가는 9개의 사찰이 있다고 그렇게 부릅니다. 그중의 한 곳이 바로 황복사입니다. 황복사의 최초 건립은 선덕여왕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존호가 '성조황고'인데, 분황사처럼 '황'자를 넣어 황복사를 만들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황복사는 역사서에는 여러번 등장하는데 먼저 진덕여왕 때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와 경주에 머무를 때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해요.
경문왕과 표훈대사
그 대표적인 제자가 표훈 대사이지요. 표훈 대사와 경문왕의 후사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표훈 대사가 경문왕의 부탁으로 여자로 태어날 아이를 천계의 법을 어기고 남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어요. 이 사람이 바로 경문왕 사후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 혜공왕이고, 천계를 어기고 태어난 혜공왕의 성 정체성 문제를 빌미로 김양상, 김경신의 반란이 일어나 혜공왕은 시해되지요. 그리고 반란의 주역인 김양상은 선덕왕이 되고 김경신은 괘릉으로 잘 알려진 원성왕이 됩니다.
고려시대 '법계도기총수록'이라는 불교 기록에 그 당시 표훈이 황복사에서 강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경문왕과 표훈의 이야기는 아마 이 황복사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경문왕은 사후 이곳 황복사에서 화장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라 최초의 쌍탑지 황복사
최근의 황복사 발굴 과정에서 목탑지 두 곳이 발견되었다고 방송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유적상 최초의 쌍탑은 사천왕사 목탑으로 추정했는데, 황복사지에서 6C, 7C 목탑지가 발굴됨으로써 이곳이 신라 최초의 쌍탑지라는 것에 무게가 실리고 있어요. 그리고 2 탑 1 금당 형식의 기본적인 구조의 황복사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만든 탑
그렇다면 현존하는 3층 석탑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기존 황복사지 서쪽에 사찰의 기본적인 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별도로 만들어진 석탑에 대한 의문은 석탑 해체 발굴 과정에 2층 지붕돌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면서 풀렸습니다. 사리함 뚜껑 안쪽에 신문왕 사후 신목 왕후와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과 이후 성덕왕이 신문왕,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부처 사리와 불상,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안치한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탑을 만든 경위와 시기를 명확히 할 수 있지요.
또 금제 아미타불상 2개의 아미타 부처는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부처입니다. 보통 죽은 사람을 극락에 가길 기원할 때 아미타 부처에게 기도하지요. 그래서 효소왕이나 성덕왕은 아버지 신문왕의 극락정토행을 기원하기 위하여 아미타 부처를 만들어 탑 안에 넣지 않았을까 유추해 봅니다.
또한 명문에 '종묘성령선원가람'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종묘'란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고, 선원 가람이란 참선을 주로 하는 사찰이란 의미인데, 이로 미루어 황복사가 신라 왕실의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의 기능을 하는 황실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어요.
국보 3개를 품은 황복사 삼층석탑
황복사 삼층석탑은 외형은 작은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국보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가 봅니다. 화려하고 정형미가 뛰어난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웅장한 느낌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약간 수더분하다거나 촌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건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그래도 명색이 국보인데 제가 모르는 어떤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 탑 사리함에서 나온 금제 아미타여래 입상과 금제 아미타여래 좌상은 둘 다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엄청 아름다워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지요. 입상은 효소왕이, 그리고 좌상은 성덕왕이 사리함에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크기가 10cm 정도로 작고, 1mm도 안되는 두께로 얇게 만드는 금제련술은 당시의 우수한 기술력을 보여 줍니다.
이 탑의 또 다른 특징은 사리함을 2층 지붕돌(옥개석)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기단이나 몸돌에 넣는 것이 정상적인데 이 부분이 특이합니다.
오늘은 황복사와 삼층석탑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눈여겨볼 점은 황복사는 선덕여왕대쯤에 만들어졌고, 황실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삼층석탑은 기존 사찰 양식과 별도로 황복사 서쪽에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삼층석탑은 국보를 3개나 갖고 있고요. 이 정도만 기억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곳은 낭산 너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이라 지금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멀리서 오시는 분들은 시내의 둘러볼 유적들이 너무 많아서 이곳까지 발걸음 하기가 쉽지는 않고요. 하지만 여유가 되시면 이곳도 구경하고,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진평왕릉도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라 왕실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신라의 훌륭한 유물들이 발견된 황복사지와 삼층석탑을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찾아오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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