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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효소왕과 성덕왕의 왕권강화와 뿌리깊은 진골세력들의 권력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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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효소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효소왕대의 정치상황과 치적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고, 성덕왕과의 왕위 계승과 성덕왕대의 귀족들과의 권력관계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어린 효소왕과 신목왕후의 섭정

 효소왕은 신문왕에 이어 6살의 나이로 등극한 7C 마지막 왕입니다. 어린 나이로 인해 어머니 신목 왕후의 섭정과 아버지 신문왕 등극 시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왕족 출신 공신들에 의해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 남시와 서시를 설치해 지증왕 때의 동시와 함께 3개의 시장을 갖추었어요. 이는 통일 후 경주에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제도를 정비 설치하고, 옛 고구려 남부지역인 패서(송악) 지역을 개발하고 축성을 하였어요. 발해가 건국하자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내리기도 합니다.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효소왕

진평왕의 천사옥대의 장식이 진짜 용임을 간파하고 물에 놓아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는 왕이 현명했다는것을 보이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국선 부례랑과 관련된 잃어버린 만파식적을 되찾아 만만파파식적으로 개명했다는 일화도 있어요. 또한 득오와 죽지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죽지랑가란 향가의 배경도 효소왕 때입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건립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황복사에 삼층석탑을 세웁니다. 탑의 사리함 기록에 따르면 효소왕과 신목 태후가 발원자로 되어 있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아미타불상도 함께 봉안하였지요.

 

친정체제로 시도가 허사가 되다(미심쩍은 효소왕의 죽음)

 효소왕이  재위하던 700년에 경영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흠돌의 난 진압의 일등공신인  중시를 하던 김순원이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숙청되었지요. 그리고 섭정하던 신목 왕후도 그해에 죽었고, 2년 후 효소왕도 16세의 팔팔하던 나이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게 되지요.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재위 끝무렵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에 대한 자료가 없어 잘 알려진 바는 없지만, 추측컨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공신들이 신문왕대부터 권력의 핵심으로 대두하였어요. 이 공신들은 거의 대부분 진골 왕족이기도 하였지요. 이들 공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나름 총명한 효소왕이 이들을 견제, 압박하고 경영의 난을 기회로 김순원을 축출하고, 공신들을 배제하는 등 일전을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공신 세력들의 단결을 초래했고, 효소왕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효소왕은 경영의 난이 일어난 뒤 2년이 지난 702년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습니다. 한창 젊고 팔팔한 나이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공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섭정을 하던 신목 왕후도 먼저 죽었고, 결혼도 하지 않아 뒤를 봐줄 외척도 존재하지 않은 효소왕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제거되었을 것 같습니다.

 

진골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성덕왕

 이렇게 효소왕의 말년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성덕왕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덕왕은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의 추대에 의해 왕이 됩니다. 이때만 해도 장자상속이 우선이고, 그다음이 형제 상속이라는 원칙이 어느 정도는 확립된 시기이지요. 그런데 그냥 동복 아우로서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하면 될 것인데, 굳이 화백회의의 추대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진골귀족 혹은 권신들의 힘이 막강하고 나이 어린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뜻이겠지요. 

 

의문의 왕비 교체

 이러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성덕왕의 가계를 살펴보면 권력의 향배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성덕왕의 첫째 부인은 성정 왕후인데 소판 김원태의 딸입니다.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결혼하였는데, 왕위에 오른 3년 뒤 정식 왕비에 됩니다. 슬하에 태자로 책봉된 장남 김중경과 차남 김수충을 낳았습니다. 재위 15년 되는 해에 진골 왕족 김순원 등에 의해 쫓겨나는데 성덕왕이 많은 재물을 내린 걸 봐서 성덕왕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많이 안타까워한듯합니다.

 둘째 부인은 김순원의 딸 소덕 왕후인데 처음에는 성덕왕의 후비가 됩니다. 슬하에 후에 왕위에 오르는 효성왕, 경덕왕이 있습니다. 효소왕대의 경영의 난으로 연루 의혹을 받아 숙청된 김순원이 성덕왕 때 바로 복권이 되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지요. 이후 세력을 키워 기존 왕비를 쫓아내고 자기의 딸을 왕비로 만들어 버리네요. 대단한 권력가입니다. 다음의 가계도를 보면 김순원의 위세를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효성왕, 성덕왕 가계도
권력의 판도를 가늠해볼수 있는 효소왕 성덕왕 가계도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문왕, 효소왕을 거치며 전제왕권이 많이 강화되었다고 해도 아직도 진골 왕족 세력의 힘이 그대로 유지됨을 볼 수 있어요. 신라사회는 처음에는 6부 귀족세력이, 그다음에는 박, 석, 김 씨의 연합 귀족세력이, 그리고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이 된 후에는 진골귀족세력이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 견제하며 존속하였어요. 국가가 위기 상황일 때 힘을 합칠 경우에는 큰 힘을 긍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지만, 평화가 찾아오면 오히려 각자의 권력유지를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진골이 왕위를 차지한 이후에는 진골이면 누구나 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지지요. 또한 그러한 진골의 숫자도 너무나 많았어요. 

 성덕왕 때도 아마 이러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왕위를 유지하고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김순원 세력과의 타협이 불가피했을 것 같아요.

 

중국 최초의 등신불, 지장보살 칭호를 받는 김교각은 누구인가

 이때 왕비 교체의 최고 희생자는 아마 성정 왕후와 그의 소생들인 김중경과 김수충이 아니까 생각합니다. 김중경은 태자로 책봉된 뒤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김수충은 당에 사신으로 갔다 온 다음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중국 구화산에서 중국 최초의 등신불이 된 스님 김교각은 신라에서 온 왕족이다라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연대를 맞추어 보면 성덕왕과 성정 왕후의 아들 중에 한 사람이 김교각이 아닐까 역사학계에서는 유력한 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김교각은 신라 왕실의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껴 중국으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였지요. 그렇다면 기록상 죽었다는 김중경일까요, 혹시 성덕왕이 빼돌린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면 중국으로 사신으로 다녀온 김수충이 왕실의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껴 당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아닐까요.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잘 알려지고 아직도 추앙받는 김교각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도 성덕 왕대의 권력다툼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차후에 김교각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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