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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불교공인- 신라 최대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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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은 뭐니뭐니 해도 불교 공인(527년) 일 것 같습니다. 신라를 이야기할때 불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수가 없지요. 그런데 신라의 불교 전래는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많이 늦었지요. 그러나 뒤늦게 시작된 불교는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라의 불교 전래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불교 전래 과정에서 발생한 이차돈의 순교가 가져다준 의미는 무엇이고, 불교 공인후 신라사회는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부족 연맹체의 천신 신앙과 왕권의 제약

불교 공인 전인 5C~6C 초 신라의 상황을 한번 알아볼까요.

 지증왕이 즉위(500년) 한 후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고, 마립간에서 왕으로 칭호를 바꾸며,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노력했어요. 또한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던 순장제도를 폐지하고 ,우경을 실시하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서라벌에 시장을 개설해 상업적 유통을 원활히 하는 등 경제력 향상에도 힘을 기울였어요.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의 힘은 여전히 미약하였지요.

 

왕의 권위는 6부족의 대표

 아직까지 6부의 힘이 워낙 강하여 왕은 6부의 대표 정도의 인식과 역할밖에 하지 못하였어요. 이러한 사실은 포항 냉수리 신라비(지증왕)울진 봉평리 신라비(법흥왕)의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그 지역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참석한 지증왕이나 법흥왕은 6부의 대표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나타내고 있지요. 더구나 왕의 소속도 특정 부족의 대표로 표기될 정도입니다.  왕이 권위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사소한 문제도 6부의 대표들과 상의해 해결하고, 그 결과를 확인하고 지킬 것을 약조하는 의식도 같이 진행해야 할 정도로 왕의 힘은 미약하였어요.

 

독립적인 부족연맹체

 또한 신라 4C~6C초의 왕들의 무덤으로 인식되는 대릉원과 주변 고분군들은  6부의 한부족의 고분인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과 비교해보면 크기나 무덤양식 부장품 등에서 크게 차이가 나진 않지요. 그리고 6부는 자체 군사력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천손의 자손들이라는 선민사상도 기지고 있어서 각자 독립적으로 천신에게  제사 지내게 됩니다. 그들이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숲을 소도라 하지요.  죄인이 도망해 들어가면 왕이라도 잡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소도는 각부족의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그런데 신라안에서 그것도 왕이 살고있는 서라벌안에서 왕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것은 말이 안되지요. 이것이 그때의 6부와 왕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것이 아닐까요.

 

주변국의 불교 도입을 통한 왕권강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인 지증왕, 법흥왕 시대는 6C초중반입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을 한번 살펴볼까요. 그 당시 중국은 우리가 흔히 위진남북조라고 부르는 시대인데, 많은 나라들이 부침을 겪는 시대입니다.  불교가 왕성하게 발전하던 시대로 북쪽은 전진에서 북위로, 남쪽은 동진에서 양나라로 이어갔지요. 이들 나라들은 인도의 불교를 중국 전통의 유교, 도교에 접목시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전륜성왕이나 왕즉불 사상으로 발전시켰어요. 즉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과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받아들였지요.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였어요.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여 372년에 불교를 수용하였고, 백제는 동진으로부터 마라나타에 의해 전해져 374년 침류왕 때에 불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 공인 후 왕실 주도로 착실하게 불교와 불교를 통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율령을 반포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라 

지리적 한계로 뒤늦은 전래

 한반도의 동쪽에 자리 잡은 신라는 대륙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없는 지리적 한계가 있어지요. 그래서 문화적으로도 고구려, 백제에 뒤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초기는 고구려를 통한 개인적인 전래가 이루어졌지요. 그래서 최초 불교 전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미추왕 혹은 눌지왕, 소지왕 때에 전해졌다는 설이 있는데, 주로 아도(머리를 깎은 스님)와 묵호자(얼굴이 검은 사람) 등이 지금의 경북 북부지역인 일선군 모례의 집에서 숨어 전파하였다는 것이 정설이지요. 또한 공주의 병을 낫게 했다거나 소지왕 때의 사문갑 설화에 스님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법흥왕 이전에 어느 정도는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신라 왕실

 이에 신라 왕실과 법흥왕 입장에서는 불교 전파가 간절하였어요. 왜냐하면 중국의 북위나 양나라는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어마 무시한 권위를 내세우고, 전륜성왕 칭호를 받으며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지요. 이웃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도 불교 공인으로 국가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곧이어 율령을 반포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바로 보였습니다.

 사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 공인후 그 여세를 몰아 율령을 반포했지요. 신라의 법흥왕은 불교 공인전 율령을 반포하였지만 견고한 6부 부족들의 힘에 의해 왕의 령이 먹히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고구려 백제보다 150년이나 지났는데도 해결할 길이 없었기에 이제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어요.

 

이차돈 순교비
이차돈 순교비, 출처 : 경주국립박물관

불교 도입을 위한 특단의 대책 

이차돈의 순교

 이에 법흥왕과 이차돈의 이심전심의 밀약에 의한 순교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소위 친위 쿠데타의 성격이지요. 율령에 의지해 귀족들의 힘을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거짓 왕명을 내세워, 귀족들이 그렇게 신성히 여기는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흥륜사를 짓는 일을 이차돈이 진행하였어요. 이에 귀족들이 강력 반발하자 법흥왕은 이차돈과의 약속에 의해 귀족들 앞에서 왕명을 거짓으로 행한 이차돈을 가차 없이 목을 베어버렸어요. 그리고 왕에게 함부로 항의하는 귀족들을 반역을 하는 것이냐고 윽박질러 서슬 퍼런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는 왕에게 항명하지 못하도록 하였지요. 왕실 친척이자 왕이 가장 아끼는 내사사인(비서실)을 단번에 내치는 모습에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요.

 

이차돈과 법흥왕의 관계도
왕실의 일원인 이차돈은 법흥왕과는 오촌 아저씨뻘

 

신라 십성이 된 이차돈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는 많은 시사점을 남기고 있어요. 이차돈의 순교와 이적에 관하여는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목을 베자 목에서 우윳빛 흰 피가 솟았고, 하늘에는 꽃비가 내렸다든지, 떨어진 목이 날아가 경주 북쪽의 금강산에 떨어져 그곳에 자추사를 세웠다는 기록입니다. 이런 기록은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헌덕왕 때 만든 백률사 석당비, 해동고승전 ,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등에서 아주 비중 있게 기록됩니다. 신라 후대 및 한국불교사에서도 이차돈의 순교는 대단한 업적으로 여겨져 사람들은 그를 신라 10대 성인으로 길이길이 추앙하고 있습니다.

 

왕실 차원의 불교 진흥

 법흥왕의 비서실장이자, 왕실의 일원인 이차돈의 희생으로 이제 신라는 일사천리로 불교를 공인하고 받아들였어요. 이때까지도 신라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기에 백제의 도움으로 남조의 양 나라로부터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어요. 왕실 차원에서 불교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정립하고,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합니다. 법흥왕은 흥륜사를, 진흥왕은 황룡사를, 진평왕은 천주사 그리고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지어 왕위 계승의 정당성도 확보하지요. 법흥왕과 진흥왕은 죽기 전에 직접 가사를 입고 스님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뿐이 아니지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대까지 모두 불교식 왕호를 사용합니다. 또 진흥왕은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불교식으로 짓거나, 석가모니 가족의 이름으로 지었어요. 아들을 동륜, 금륜, 사륜으로 하고, 손자인 진평왕을 석가모니 아버지 이름인 백정으로, 왕비를 마야부인으로, 그리고 덕만, 천명 등 모두 불교식으로 바꿀 정도로 불교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어요. 이는 석가모니의 권위를 빌려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일이었어요.

 왕실 차원에서 불교 유학에도 적극적이었어요. 유학승들에 의한 불교문화와 선진문물의 유입을 목적으로 많은 유학승을 파견하였어요. 왕실 출신, 왕족들의 유학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이가 원광 대사, 자장율사 그리고 의상대사 등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신라가 호국불교, 왕실 불교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지요.

 

우리 신라가 달라졌어요

선진문물의 유입

불교와 함께 들어온 선진 문물은 신라사회와 국가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동안 지리적 한계로 선진문물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 불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수한 문물을 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상체계의 정립 호국 신앙

 불교는 재래의 샤머니즘적인(무속) 토속신앙을 극복하고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왕과 국가의 발전을 기원하는 호국 신앙으로 자리 잡았어요. 이는 왕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세속오계와 용화낭도에 나타나는 불교와 화랑제도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든든한 밑받침이 될 수 있었어요. 

 

불교문화의 융성

 우리는 흔히 신라를 천년사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주의 불교유적을 보면서 천년 동안의 유적이라 여기는데 사실은 불교 공인이 527년이고, 신라가 망하는 해가 935년이니 약 400년 동안의 유적, 유물들이지요.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400여년 동안 그들이 남겨놓은 불교 유적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남산의 그 많은 불상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역사에 기록된 그 크고 웅장했던 황룡사를 비롯한  많은 유적과 유물을 만들기 위해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네요. 오죽했으면 경주 서라벌에는 '절과 절이 하늘의 별처럼 많았고, 탑과 탑이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그때의 서라벌 거리를 표현하였어요. 그 당시 서라벌의 불교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묘사한것 같습니다.

 

신라를 얘기할 때 불교를 빼고 말할 수 없듯이, 불교를 이야기할 때 이차돈의 희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만큼 신라에 있어서 불교 공인 전후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공인으로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었고 주변국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다운 청춘이었던 이차돈에게 있어서 불교는 무엇이고, 신라(왕실)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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