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김대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들을 썼는지를 먼저 알아보고, 화랑세기를 쓴 연유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김대문 부분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족 출신 정치가이자 역사학자
김대문은 신문왕, 효소왕 그리고 성덕왕 때의 사람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면 귀족의 자제이고, 성덕왕 때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산주의 도독이라 함은 지금의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도지사 격이지요. 특히 한산주는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이고 북쪽의 국경을 책임지는 중요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9주5소경이 신문왕대에 실시되었으니 이제 막 자리 잡을 시기였지요. 그 무렵 그 정도의 중요한 지역을 책임지는 자리는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최소 진골 이상의 출신이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 전기 몇권을 지었는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등은 삼국사기를 만들 당시 아직도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김대문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습니다.
김대문 관련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김대문이 말하기를~' 하면서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왕의 칭호에 관한 뜻을 풀이한 것을 인용하였지요. 이는 김대문이 역사나 어문학에 조예가 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신라사에서 초기 왕들의 지위와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지요. 삼국유사에도 그대로 인용하였고요.
그리고 김부식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서문 끝부분을 인용했는데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부하가 여기에서 생겨났다'라고 인용하여 삼국사기에 기록하였어요.
또한 고승전을 비롯한 4권의 책을 지었고, 법흥왕조에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를 적었는데 이는 김대문의 '계림잡전'에 의거 기록하였다고 김부식은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승전은 신라의 명망있는 스님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화랑세기는 화랑과 풍월주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며, 악본은 음악 관련, 한산기는 한산주의 도독으로 있을 때의 관련 이야기임을 짐작해볼 때 김대문은 역사나 어문 등 여러 분야에 박학다식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잊혔던 화랑세기의 등장
우리는 국사시간에 화랑세기의 저자는 김대문이라고 배웠지요. 위의 언급한 것을 볼 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당시에는 화랑세기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나타내지요. 하지만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다가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화려하게 나타났어요. 내용상의 여러 문제와 위서의 논란이 뜨겁지만 화랑세기의 출현은 역사학계를 뒤흔든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화랑세기와 관련된 내용은 너무나 많아서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김대문 관련부분만 알아보겠습니다.
화랑세기의 내용을 보면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1대부터 마지막 32대까지 차례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법흥왕 때 원화 제도를 시행했는데, 남모와 준정의 다툼으로 진흥왕 때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제도를 시행했다(540년)고 합니다. 이후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신문왕이 화랑제도를 폐지할 때(681년)까지 약 150년 동안의 화랑과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지요.
그럼 어떤 부분이 김대문과 관련이 있을까요
거두절미하고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랑세기 풍월주의 역사는 김대문 가문의 역사, 즉 족보라고 할만합니다. 1대 풍월주인 위화랑은 김대문의 5대조 할아버지입니다. 위화랑과 준실 사이에 태어난 이화랑은 4대 풍월주이고, 2대 풍월주 미진부공과 3대 풍월주 모랑은 위화랑의 사위가 되지요. 여기에다가 5대 풍월주는 위화랑의 외손자인 사다함이 되니 , 초기 풍월주는 완벽한 위화랑 집안, 즉 김대문의 집안의 내력이 되었네요.
이후 미실과 가까운 관계인 사람과 미실 집안의 세력들이 한동안 풍월주를 차지하다가, 중반에는 김용춘과 김유신 등의 신흥세력이 풍월주를 이어 갑니다. 하지만 통일 이후는 가야계 출신들인 김흠돌의 사람들이 화랑제도가 폐지되는 신문왕대까지 화랑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그러나 여러 세력들이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위화랑의 자손들은 여지없이 풍월주가 되는 풍월주 집안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처럼 김대문의 가문은 뼛속까지 화랑이요, 풍월주이지요. 그래서 화랑과 풍월주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만든 이유
김대문의 아버지 오기공은 가야 출신 풍월주 사이에서 유일한 비가야 출신이었어요. 김대문의 어머니 운명은 문무왕의 왕비인 자의 왕후와 자매 사이입니다. 그렇기에 문무왕에서 신문왕으로 왕위 계승과정에서 김흠돌의 난이 발생했을 때 오기공이 적극 나서서 자의 왕후와 힘을 합쳐 신속한 대처로 난을 진압할 수 있었어요. 이후 신문왕과 자의왕후는 화랑제도를 폐지하고 화랑들의 명단을 조사하는 것을 오기공에게 맡기게 됩니다. 오기공은 이제까지의 화랑들의 명단을 향음으로 작성하는데 , 향음은 신라의 이두식 표현, 즉 신라의 발음으로 기록하였지요.
이후 오기공이 화랑들의 계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아들 김대문이 향음을 한자음으로 바꾸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김대문은 원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지요. 더구나 아버지가 못다 한 조상들과 신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위서 논란은 있지만 화랑세기의 등장은 여러모로 화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지요. 위서든 진서이든지 화랑세기가 등장함으로써 신라역사가 한층 풍성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필사본이 아닌 진짜 화랑세기가 나타나길 기원해봅니다.
화랑세기의 자세한 내용은 따로 한번 공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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