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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노동동 고분군 그리고 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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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에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분입니다. 경주 어는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대릉원 고분군에 속해 있으면서 대릉원 후문 맞은편에 있는 노동동 고분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노동동 고분에는 봉황대, 금령총, 식리총 그리고 옥포총 등 4개의 고분이 밀집해 있습니다. 하나하나 찾아가 보겠습니다,

 

고분의 구분

 먼저 무덤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왜 그런지 알아 볼까요.  일반적인 모든 무덤을 라고 합니다. 묘 중에서 봉분이 있는 오래된 무덤고분이라 하고, 고분중에서 왕과 왕비 그리고 귀족의 무덤으로 예상되나 그 주인을 알수없을 경우 규모가 큰 고분을 총이라고 합니다. 그 총중에서 주인을 알 수 없을 경우 발굴 시 특징적인 유물의 이름을 붙여 OO총 이라 이름 짓고, 무덤의 주인을 특정 왕이나 왕비의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을 때, 이라고 합니다. 태종무열왕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김유신 장군의 무덤을 묘라고 하지요. 

 경주시내지역에는 약 1,300여기의 고분이 있습니다. 그중에 무너져 희미하거나, 작은 봉분들, 그리고 구석진 곳에 있는 것들은 제외하고, 규모가 있고 밀집해 있는 고분들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번호를 부여했는데 1호~155호까지 번호를 부여했어요. 예를 들면 155호 고분은 천마도가 출토되어, 155호라는 번호 외에 천마총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얻게 되었지요.

 

고분의 형성 고분양식

 시내지역의 고분은 4C 중반~6C 초반까지 마립간 시대의 무덤으로, 내물 마립간에서 지증왕까지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인을 알수 있는 명문이나 유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많은 유물들을 조사한 결과 시대는 특정할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대형고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분들은 적석목곽분의 양식이고, 일부는 6C후반에서 7C초에 조성된 횡혈식 석실분의 양식을 하고 있어요. 이후 법흥왕 때부터는 그동안의 평지형 고분에서 산지형 고분으로 변해 갔어요. 자세한 내용은 고분을 설명한 블로그 내 다른 글을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노동동 고분군을 둘러볼까 하는데 그 중에서도 먼저 봉황대 부터 구경해보겠습니다.

 

노동동 고분군과 공영주차장
노동동 고분군을 구경할때는 바로 옆에 있는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좋이요

봉황대

엄청난 크기에 일부러 만든 전망대로 착각

 봉황대는 왕성의 가장 북쪽에 있고, 아직 미발굴 고분입니다. 단일 무덤으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기도 합니다. 지름이 82m, 높이가 22m로 규모가 워낙 크고, 봉분에 고목들이 자라고 있어서 한때는 작은 동산으로 혹은 전망대로 착각한 적도 있어요. 조선시대 문인들의 경주 여행기에는 봉황대는 항상 전망대로 기록하고 있지요. 관혼상제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이 일부러 무덤을 전망대로 할리는 만무하고, 지금처럼 깔끔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을 때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봉황대라는 명칭은 신라 때부터 쓰인 것이 아니고, 아마 조선시대 문인들이 봉분의 모양을 보고 봉황의 알과 비슷하다고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동궁 월지를 조선시대 문인들이 월지안의 오리(안)와 기러기(압)의 모습을 보고 신라 천년사직의 허망함을 시로 노래한 것에 유래해 안압지로 부르듯이, 봉황대도 아마 그러한 것 같아요. 1800년대 초 금석문과 역사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가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왔을 때 봉황대를 보고 고분이 아닐까 추정했다고 합니다.

 

봉황대 전경
고목들이 세월을 말해주는 봉황대

조성시기와 양식

 그리고 현존 고분들이 왕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조성되었다고 볼 때, 시기상으로도 가장 늦게 조성된 것으로 6C 초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그래서 학자들은 마립간과 왕의 칭호를 차례대로 사용했던 지증왕의 무덤이 아닐까 예측하기도 합니다. 무덤양식은 근처의 대형고분들이 그러하듯 십중팔구 적석목곽분으로 확신하고 있지요.

 

봉황대 - 왕의 무덤인가. 신라를 가라앉게 한 원흉인가

 봉황대는 크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신라 말 혼란의 극을 달리던 신라는 위태위태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지요. 천년의 신라를 차지하려는 왕건은 세상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도선은 서라벌은 배의 형상이라 가라앉히면 된다고 하지요. 그리고 신라에 들어가 서라벌은 봉황의 둥지 형상인데 나라가 어지러워 이제 봉황이 떠나려 한다고 거짓 소문을 냅니다. 그러자 신라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대책을 물으니, 봉황 알 모양의 큰 봉분을 만들면 된다고 하였어요. 왜냐하면 알을 두고 떠나는 새는 없으니까요. 이는 굉장한 설득력있는 논리라 신라에서는 봉황새 알모양의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지요. 하지만 배에 그렇게 무거운 흙더미가 실렸으니 배가 무사할리가 없겠지요. 무거운 짐에 배가 가라앉듯이, 결국 신라는 망하고 말았어요. 믿거나 말거나가 아닌 믿을 수 없는 호사가들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나라가 망하고 나니 오만가지 이유를 다 갖다 붙이는 모양새입니다. 봉황대는 신라가 망하기 전에 이미 500여 년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말입니다.

 

 

봉황대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봉황대는 언제쯤 그 속살을 우리에게 보일까요. 과연 보이기나 할까요. 만약에 발굴을 한다면 그 안에는 또 어떤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우리를 놀라게 할까요. 금관이 또 나올까요. 그것도 아니면 누구의 무덤인지 속시원히 알려나 줄까요.

이런 숱한 궁금증들을 가지는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겁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대와 설렘을 함께 가지고 있겠지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굴과 보존의 딜레마가 생기기도 합니다. 과연 발굴이 우선일까요, 보존이 우선일까요.

 

식리총 금동신발

 봉황대 남쪽에 있는 무덤으로 장례용 금동신발이 출토되어 식리총으로 이름이 붙여졌어요. 식리라는 말이 좀 어려운데 '장식 식'과 '신발 리" 그래서 장식용 신발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신발이 출토된 경주의 고분으로는 황남대총 남분, 천마총, 금령총, 금관총, 그리고 여기 식리총이 있어요. 신발이 출토된 고분들은 대체로 금관과 같은 지위를 상징하는 많은 유물이 함께 출토된 걸로 보아 이 식리총도 왕족이거나 최고 귀족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근처의 다른 고분들과 비슷하게 적석목곽분이며, 5C 후반~6C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금령총 어린 왕자의 무덤인가 이름도 예쁘네요

 금령총도 위의 고분처럼 고분 양식과 조성시기는 비슷합니다. 발굴 시 특이한 금제 방울이 출토되어 금령(鈴, 방울 령) 총이란 이름을 짓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금령총에서 금관, 관모, 은제 허리띠, 금동신발, 각종 토기류, 마구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어요. 특히 특수한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2개의 기마 인물형 토기입니다. 금령총은 요것만 아셔도 될 것 같아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귀족상과 하인상으로 우수한 조형예술품입니다. 당시의 풍습과 마구류 장식 그리고 복식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금관이나 금동신발의 크기 및 부장품으로 미루어 10세 전후의 남자아이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금관이나 금동신발과 같은 귀중품과 함께 매장될 정도면 혹시 왕자의 신분이 아닐까 나름 상상해 봅니다.

 

식리총과 금령총
윗부분이 평평한 식리총과  아직 발굴중인 금령총 입니다

옥포총 이름이 특이하네요

노동동 맨 끝에 있는 무덤으로 무덤이 있던 곳에 경주 관아의 늙은 기생 옥포가 살던 곳에서 발견되어 옥포총으로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금, 은제 장신구와 철기 무기류 그리고 말 장신구가 출토되어 남자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현재는 봉분도 희미해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이상 노동동 고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봉황대, 식리총, 금령총 그리고 옥포총까지 다른 고분군에 비해 숫자는 적지만 나름 의미 있는 유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어서 알아볼 노서동 고분군과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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