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앞서 소개한 노서동 고분군(1)에 이어서 노서동 고분의 대표주자 금관총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고분이라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걸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최근 몇년래 계속된 발굴과 연구로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발견되고, 경주시에서도 많은 돈을 투자해 금관총 유물전시관을 만드는 등 조만간 금관총에 관하여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금관총만 별도로 떼어내어 공부해 보았습니다.
신라 유적발굴의 도화선이 된 금관총
일제강점기 가옥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무덤으로, 발견 당시 도굴된 것처럼 봉분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지요. 하지만 뜻밖의 금관이 발견되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세계 역사 학술지 커버에 게재되면서 세계적인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많은 금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경주의 수많은 신라 고분들의 가치를 아는 계기가 되었고, 추후 많은 고분들을 발굴하는 결정적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졸속 발굴로 자료가 애매한 것이 많고, 일부 유물은 일본으로 유출된 것은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금관총의 스펙
금관총의 조성연대는 출토된 유물들을 보아 대략 5C 후반으로 추정되는 돌무지 덧널무덤(적석 목관분) 양식입니다. 원형은 지름은 45m이고, 높이는 약 12m로 대형의 크기인데, 현재 봉분 자리에는 금관총 유물전시관의 공사가 한창입니다.
엄청난 양의 유물 출토
이제까지 출토된 유물들은 약 3만여 점 정도입니다. 금관 이외에도 순금 귀고리, 금과 은 팔찌, 반지와 각종 구슬, 금제 은제 허리띠, 금동신발의 장신구류와, 각종 칼 등의 무기류, 그리고 말 장식류 등입니다. 그리고 각종 토기와 곡옥 등 실로 엄청난 수량이 출토되었어요. 금관총 이곳에서만 출토된 순금의 무게만 해도 약 7.5kg 정도라니 정달 대단합니다. 이것이 다가 아니지요. 하나같이 세련되고 화려하고 예술적이지요. 모두를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물들의 기술적, 예술적 가치는 매기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국보로 지정된 금관과 금제 허리띠에 대해서 별도로 알아보겠습니다.
금관총 금관 및 금제장식, 화려한 신라문화의 시작
금관총 금관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금관입니다. 그래서 128호분으로 부르다가 금관총이란 이름도 얻게 되었어요. 이 금관은 외관인 금관과 내관인 관모 그리고 관모에 꽂는 금제장식의 3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이세개를 하나로 묶어서 금관총 금관 및 금제장식으로 부르고 국보로 지정하였지요.
우리가 흔히 금관이라 하는 것은 외관을 말하는데 금관총 금관은 우리나라 금관을 대표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하고 예술성이 뛰어나지요. 가운데는 3단의 출자형 장식이 3개이고, 양 옆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하나씩 있어요. 금관에 달린 각종 구슬과 곡옥 및 길게 늘어뜨린 드리개가 금관을 한층 화려하게 보이게 하지요.
내관인 관모는 고깔 형태의 관으로 머리에 쓰고 끈으로 턱에 묶어서 고정합니다. 문양이 새겨진 여러 장의 얇은 금판을 붙여서 관모의 형태를 만들고 아랫부분은 머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타원현으로 만들고 관모의 윗 부문은 하트 모양의 문양을 넣은 것이 특이합니다.
금제장식은 관모의 앞에 꽂는 것으로 새날개 모양입니다. 이는 그때의 신앙과 관련된 샤머니즘의 요소가 포함된 것이라 합니다. 즉 인간과 하늘은 연결시켜주는 존재인 새를 표현한 것이지요.
금관총의 또 다른 국보인 금제 허리띠
금제 허리띠는 띠 부분인 과대와 장식 부분인 요패로 나눌 수 있어요. 띠 부분은 얇은 금판으로는 띠를 만들 수는 없지요. 그래서 가죽이나 직물의 띠(요대)를 이용하는데, 이 요대 위에 금판을 붙이고 연결하여 띠를 완성하면 이를 과대라 합니다. 과대의 양끝에는 과대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인 교구가 있습니다.
장식 부분은 이 과대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아 늘어뜨린 것을 요패라 하지요. 금관총 금제 허리띠에는 모양이나 길이가 서로 다른 17개의 요패가 달려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금관총 금제 허리띠는 신라에서 확인된 허리띠 중 가장 많은 요패를 달고 있으며, 금실과 금구슬로 연결한 유형과 타원가 네모의 장식판을 경첩 방식으로 연결한 두 가지 유형이 모두 확인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금관총의 주인 이사지왕은 누구인가
해방 이후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꾸준히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2013년에 세 고리자루 큰 칼에서 '이사지왕'이란 명문이 발견되었지요. 이를 계기로 일제의 부실한 발굴로 고분의 구조나 유물들의 출토 상황 등에 애매한 점이 많아서 2015년 재발굴을 했어요. 그런데 이 재발굴 과정에서도 '이사지왕도'란 다섯 글자가 새겨진 칼집 조각을 새로 발견했어요. 신라의 무덤에서 명문이 출토된 곳은 여럿 있지만 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출토된 것은 금관총이 유일하지요. 이에 따라 금관총은 '이사지왕'의 무덤이라고 거의 확실시되었지요. 그럼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무덤의 조성시기인 5C 후반의 왕으로는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 지증왕의 시기라 볼 수 있지요. 음운적으로 볼 때 그래도 소지마립간이 가장 근접하긴 합니다. 그러나 왕의 칭호는 지증왕이 503년 왕으로 공식화하기 전부터 사용되어 왔지요.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부족의 대표들을 차칠왕이라 기록한 것이나, 갈문왕 제도를 볼 때 꼭히 왕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사지왕이 누구인지 몰라도,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금관총 유물 보존 전시관
처음 발굴 시 일제에 의한 졸속 발굴로 인한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2차에 걸친 추가 발굴이 있었지요. 2차 발굴에서도 중요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경주시에서는 금관총의 복원사업을 시작했어요. 천마총과는 다른 모습으로 무덤 내부를 보여줄 것 같아요. 또한 일부 금관총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금관총 유물 전시관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아마 올해 안으로 개관할 것 같은데 경주의 새로운 관광코스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흥미 삼아 알아보는 금관총 출토 금 가격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금의 양은 무려 7.5kg 정도라고 합니다. 실로 엄청나게 많은 양이지요. 흥미 삼아 단순하게 금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세속적인 모습은 선조들에게 불경스러운 일이나 재미로 알아보는 것이기에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24K라 가정
금의 무게 7,500g
1돈은 3.75g
약 2,000돈
1돈 320,000원
그래서 2000돈*320,000원=6억 4천만 원이 되네요.
조상들의 유품을 가지고 세속적인 값어치를 따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6백억이 아니라 6천억 원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우리의 유산입니다.
이번 천마총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이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아직 발굴하지 않은 더 크고, 더 많은 고분들을 보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하고 풍성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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