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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노서동 고분군(1) 신라의 역사를 새로 쓰다. 서봉총과 호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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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동 고분군에 이어서 오늘은 도로 하나를 두고 인접해있는 노서동 고분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노동동 고분군4기의 고분이 있지만, 노서동 고분군에는 총 14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고, 발굴 고분마다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노다지 유적이라 할만합니다. 금관총은 노서동 고분(2)에서 다루기로 하고, 나머지 고분 하나하나 조사해보겠습니다.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많은 고분들이 오손도손 모여있는 노서동고분군

노서동 고분 분류

 총 14개 고분 중 발굴 조사된 고분으로는 금관총, 표형분인 서봉총(북분)과 데이비드 총(남분), 우총, 쌍상총, 마총 그리고 또 다른 표형분인 은령총과 호우총입니다. 노서동 고분군에서 미 발굴된 고분으로는 봉황대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서봉황대, 서봉황대 바로 남쪽에 있는 표형분인 또 다른 거대 고분 134호분, 그리고 남쪽으로 연접해 있는 135호분과 136호분 등 4개가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오밀조밀 붙어있는 고분들의 이름들을 찾아보는 것도 아주 흥미롭고 좋은 추억이 될것 같습니다.

 

 또 무덤의 양식으로 구분해 보면, 우총, 마총, 쌍상총은 굴식돌방무덤 양식인데 통일신라 시기의 무덤이고, 이 무덤들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편입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들 중 발굴된 금관총과 서봉총은 적석목곽분이고, 미발굴 거대 고분들인 서봉황대(130호분), 134호 표형분 그리고 135호분과 136호분 또한 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됩니다. 적석목곽분들은 규모가 크며, 금 관련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위에 언급한 표형분들은 2기의 고분을 붙여서 조성하여, 마치 표주박을 엎어놓은 모양이라 표형분이라 하지요. 표형분은 대개 부부묘를 붙여서 만든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표적인 표형분으로는 서봉총과 대릉원의 황남대총이 있습니다.

 

서봉총

일제강점기 우연히 발굴된 금관총에서 화려한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발견 되자, 많은 일본 고고학자들이 경주로 몰려들고 연이어 발굴한 금령총, 식리총에서도 금관을 비롯한 금공예품들이 나오자 다음 타깃을 선정하게 되지요. 마침 그때 경주의 철도공사에 많은 돌들이 필요해 서봉총의 노출된 적석들을 반출하였고, 이래저래 고분으로 의심되는 서봉총을 발굴하게 됩니다.

 

서봉황대와 서봉총
위가 평평한 앞쪽이 서봉총과 데이비드총이고, 큰 봉분이 서봉황대 입니다.

 

두개의 무덤이 붙어 있는 표형분으로 예전에는 북분을 서봉총, 남분을 데이비드총이라 하다가 요즘에는 남, 북분을 합쳐서 그냥 서봉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먼저 북분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5C 중엽 무렵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름이 36m, 높이는 약 9.6m 정도인 대형 무덤입니다. 일제강점기 스웨덴(서전)의 황세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가 일본으로 신혼여행 왔다가, 발굴에 참여했다 하여 '서'자와 출토된 금관의 관에 세 마리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어서 봉황의 '봉'자를 따와서 '서봉총'이라 이름 지었어요. 서봉총에는 금관과 관장식, 금제 귀고리, 금, 은, 구슬을 꿴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금팔찌 유리 반지, 금반지 등 최고의 장신구들과 기타 부장품들이 나왔지요.

출토 유물중 대표적인것으로 금관과 은제합을 들수 있어요.

서봉총 금관은 둥근테의 앞면에 3단의 '출(出)'자 형태의 나무모양 세개를 세우고 뒷면에는 두개의 사슴뿔 모양장식을 세운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이와 별도로 금판으로 전후좌우로 테두리까지 내부 골격이 설치되었고, 이 골격윗부분의 교차지점에 세개의 나무가지 위에  세마리의 봉황이 앉은 모습으로 만든 것이 특이합니다. 이 봉황의 모습으로 서봉총이란 이름도 얻게 되었지요.

서봉총 은제합도 중요한 유물입니다. 여기서 '합'이란 일반적으로 뚜껑이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즉 은으로 만든 뚜껑있는 그릇이 발견된것인데, 호우총의 호우처럼 내부에 '연수원년신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런데 '연수'는 연호이고, '신묘'란 기년명인데 연수란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없고, 신묘년은 451년, 혹은 511년인데 정확한 연대를 알수는 없으나 학자들은 451년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형태나 기법으로 보아 호우총의 호우처럼 고구려의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나 졸속으로 발굴했는지 발굴 리스트나 발굴 보고서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부 출토 유물들은 일본으로 몰래 반출되기도 했는데, 어떤 것들이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다고 해요. 정말 분통 터질 일이지요.

 남분은 북분의 금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것에 자극받아 영국의 재력가 데이비드의 후원으로 발굴을 하였으나 기대와 달리 북분에 크게 못미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지요.

 

표형분의 남녀 차이, 신분의 차이인가

 통상적으로 표형분은 남북으로 연결조성되는데 피장자는 남분은 남자, 북분은 여자의 무덤입니다. 황남대총을 보아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황남대총의 경우 여자인 북분은 금관이, 남분은 금동관이 출토되고, 서봉총의 경우 여자인 북분은 금관을 비롯한 온갖 화려한 장신구들이 나오는 반면, 남자 무덤인 남분의 유물은 북분과 비교해 초라하기 그지없지요.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비록 부부지만 여자의 신분이 남자보다 높아서 일까요. 아니면 죽음의 선후 시기에 따른 문화의 변화나 부장품 제조 기술의 차이 때문일까요.

 

호우총, 뜻밖의 유물 호우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의해서 발굴된 최초의 고분입니다. 발굴 시 봉분 윗부분은 사라지고, 약 2m 정도의 평평한 높이로 되어 있었어요. 5C 중후 반경 조성된 중소형의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은령총과 함께 쌍분, 즉 표형분인 줄 알고 발굴했어요. 하지만 두 무덤의 호석이 뚜렷하고, 겹치는 부분이 애매하여 표형분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이 호우총은 다른 고분들과 비교해서 크기는 작지만 유물의 가치로 따지면 어느 고분에 뒤지지 않습니다. 호우총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서라벌 한 복판에서 느닷없이 고구려의 '청동호우'가 출토되어 호우총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지요. 그릇의 밑바닥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어요. 여기서 '을묘년'은 415년으로 광개토대왕이 죽은지 2년 후에 해당되고,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품으로 만든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호우'는 말그대로 해석하면, 제사용 혹은 장식용 술사발 정도가 되겠네요. 또 마지막 글자 '십'과 상단의 '#'의 해시태그 문양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명문(글자)이 새겨진 유물은 서봉총 은합의 명문과 함께 단 2점 뿐이라고 합니다.

 

 그럼 왜 서라벌의 한복판에  고구려의 유물이 묻힌 것일까요. 과연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이 의문의 단서를 일부 학자들은 복호에게서 찾기도 합니다. 복호는 내물 마립간의 둘째 아들이지요. 형인 눌지와 동생 미사흔을 포함해 3형제 입니다. 내물마립간 시대는 국력이 미약해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백제 가야 그리고 왜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어요. 그 시절 신라는 그런 연유로 거의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지요. 광개토대왕이 412년 죽고, 장수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에게 '복호가 덕이 많다고 하니 가까이서 같이 지내고 싶다'며 인질로 요구를 하지요. 신라는 어쩔 수 없이 복호를 인질로 보내게 되고, 복호는 6년의 인질 생활을 한후에 박제상의 용기와 기지로 신라로 겨우 돌아오게 되었지요. 그때가 518년입니다. 이런 연유로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에 있던 복호가 소지하고 있다가 가지고 온 것이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고구려의 신하가 신라에 머물다 죽은 후 유품과 같이 묻혔을 거라 추측하기도 하지요.  이 호우총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도 대체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역사는 상상의 영역이니, 나름 이런저런 상상을 해봅니다.  

 

은령총

 호우총과 연접해 있어 무덤양식이나 조성시기는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은방울이 출토되어 은령총으로 명명되었고, 피장품으로 볼 때 귀족 여성의 무덤으로 예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락바퀴라는 실 만드는 도구와 금제 머리 장신구가 출토되어 여성으로 추정하지요. 또한 일반적으로 대도 즉 큰 칼은 남자의 무덤으로 생각하는데 이곳에서는 소도 즉 작은 칼들만 나와서 여성의 무덤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도 금제 및 금동제의 여러 가지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쌍상총, 우총, 마총

 위의 세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7C 중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양식으로 보면 도굴에 용이한 구조라서 그런지, 아니면 부장품을 넣지 않아서 그런지, 모두 도굴된 상태로 발견되었어요. 그리고 이 시기는 불교가 한창 왕성하게 퍼져나가는 시기로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과 사상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무덤 안에 특별한 부장품들을 많이 넣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면 모든 것이 풍롭게 있는데 굳이 장식할 것도, 무기도, 그릇도 가져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쌍상총은 2개의 주검을 놓는 받침대가 있어서 부부묘로 추정하여 쌍상총이라 하고, 우총은 아마 소와 관련된 유물이 나와서 붙은 이름인 것 같고, 봉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총 또한 말뼈가 나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노서동 고분군 서측 편에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어요.

 

자 이제 노서동 미발굴 고분을 알아볼까요

 

서 봉황대

노서동 고분군의 북쪽 끝에 있는 고분으로 황남대총, 봉황대와 더불어 사이즈로는 탑 3에 들어가는 초대형고분입니다. 서봉황대는 봉황대에 비교해 봉분 지름은 4m가 작지만, 높이는 외려 30cm 더 높아서 크기만으로도 왕릉으로 추정해도 손색이 없지요. 하지만 미발굴된 상태라 다른 고분들에 비해 존재감은 없지만, 만약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봉황대와 더불어 최대의 기대주가 될것 같아요.  

134호분

서봉황대 남측에 있고, 표형분으로 표주박 혹은 낙타등의 모습이 확연합니다. 이 134호분에는 신라의 또 어떤 부부가 함께 묻혀서 잠들고 있을까요.

 

미발굴 134호 표형분과(오른쪽) 135호(왼쪽)
미발굴 표형분인 134호(오른쪽), 135호분(왼쪽) 

135호분, 136호분

은령총과 134호분 사이에 있는 무덤으로, 135호분은 중형, 136호분은 소형으로 거대 고분들 사이에서 아담하니 귀엽게 보이네요. 꼭 엄마 옆에 붙어 있는 큰 아기, 작은 아기의 모습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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