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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과 성덕왕의 왕권강화와 뿌리깊은 진골세력들의 권력다툼 이번에는 효소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효소왕대의 정치상황과 치적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고, 성덕왕과의 왕위 계승과 성덕왕대의 귀족들과의 권력관계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어린 효소왕과 신목왕후의 섭정 효소왕은 신문왕에 이어 6살의 나이로 등극한 7C 마지막 왕입니다. 어린 나이로 인해 어머니 신목 왕후의 섭정과 아버지 신문왕 등극 시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왕족 출신 공신들에 의해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 남시와 서시를 설치해 지증왕 때의 동시와 함께 3개의 시장을 갖추었어요. 이는 통일 후 경주에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제도를 정비 설치하고, 옛 고구려 남부지역인 패서(송악) 지역을 개발하고 축성을 하였어요. 발해가 건국하자..
불교의 발전과정 오늘은 인도불교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경전과 불상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초기 불교 계파의 성립과 분열 과정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고, 대승불교의 생성과정과 전파까지 공부해 보겠습니다. 근본(원시) 불교시대 1차 결집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BC 544년) 후 90일이 지나 부처의 제자 500명이 모여서 부처의 말씀을 부처가 직접 설하신 내용인 경장과, 부처님이 정한 계율에 관한 내용인 율장에 대한 정리를 합니다. 으뜸 제자가 한 구절을 암송하면 나머지 모인 사람이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부처님의 말씀이 맞다고 하면 확정을 하지요. 이런 과정을 결집이라 합니다. 1차 결집은 경과 율에 관한 내용을 암송하는 방법으로 구전됩니다. 그때의 지식 전달 수단은 암송에..
흥덕왕과 장화부인 사랑일 까 연민일까. 왜 이리 먼곳까지 왔을까 오늘은 신라역사에 대해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부부사랑의 대명사 흥덕왕과 장화 부인, 그리고 사진 마니아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 흥덕왕릉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함께 흥덕왕릉의 숨은 역사를 찾아 한번 가볼까요. 왕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어래산 동쪽 기슭인 안강읍 육통리에 있습니다. 동남쪽으로 넓은 안강 뜰이 펼쳐진 양지바른 곳이지요. 정면 맞은편에는 조선시대 전통 양반마을인 양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대 다른 왕릉들과는 다르게 이곳은 왕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흥덕왕의 왕비인 장화 부인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2달 만에 숨을 거두게 되지요. 이후 약 10년이 흘러 흥덕왕도 유언으로 장화 부인과 합장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신라 최대의 전성기 성덕왕, 그리고 격식 갖춘 성덕왕릉 오늘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더 잘 알려진 성덕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왕들과 다르게 성덕왕을 '성덕대왕'으로 부릅니다.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성덕대왕의 치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성덕대왕릉의 특징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선대 왕들의 탄탄한 기반 33대 성덕대왕은 이름 그대로 굉장한 덕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인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신문왕이 나라의 기반을 튼튼이 한 덕분에, 효소왕을 이은 성덕왕은 신라 최대의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지요. 사서의 기록에 출생에 관한 것은 없으나 효소왕처럼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8C초부터 약 35년간, 다른 왕들에 비교해 오랜 기간 재위하였습니다. 재위 초기 권신들에 ..
이사부장군 울릉도, 독도를 우리에게 안겨준 신라 최고의 지장 울릉도, 독도를 우리에게 안겨준, 그래서 우리나라를 빛낸 100인 중 한 사람으로 뽑힌 신라 최고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이사부 장군에 대하여 공부해 보겠습니다. 신라가 주변의 소국들을 합병하고(지증왕,법흥왕), 최대의 영토로 확장하던 시기(진흥왕)에 활약한 장군이지만 워낙 사료가 부족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도 참조하여 나름 열심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왕족 출신의 이사부 장군 가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사부는 내물계로 복호에서 습보로 이어지고, 습보는 조생 부인과 결혼으로 지증왕과 선혜 공주 그리고 이사부의 아버지인 아진공을 낳게 됩니다. 이사부는 지증왕 법흥왕 그리고 진흥왕 시기에 활약하게 되는데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까지 참조하면 지증왕은 삼촌이며, 법흥왕은 사촌관계이지요. 진..
작은 크기, 많은 이야기 문화재의 보고인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황실사찰 황복사 낭산 동쪽 산자락 끝에 다소곳이 외롭게 서있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구황리 삼층석탑이라 했는데 발굴할 때에 황복 혹은 왕복이란 문양이 발견되고 사서에 낭산 동쪽에 황복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황복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황복사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황실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는 황실사찰 황복사 이곳 지명이 구황리 혹은 구황동이라 하는데 원래 '황'자가 들어가는 9개의 사찰이 있다고 그렇게 부릅니다. 그중의 한 곳이 바로 황복사입니다. 황복사의 최초 건립은 선덕여왕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존호가 '성조황고'인데, 분황사처럼 '황'자를 넣어 황복사를 만들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황복사는 역사서에는 여러번 등장하는데 먼저 진덕여왕 때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김흠돌의 반란, 통일 전쟁의 후유증 김흠돌의 반란은 신문왕이 즉위할 때에 일어난 반란으로 이후 통일신라는 체제 정비를 통해 확고한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럼 오늘은 김흠돌의 반란이 일어난 배경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을 끝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혼란의 상황이 계속되고, 당나라 또한 언제든지 또다시 침략해 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무신 진골귀족들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지요. 태종 무열왕이 진골로 왕이 되면서,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진골의 수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진골이면 누구나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왕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어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전제왕권을 확립한 준비된 왕 신문왕, 그리고 신문왕릉 신라 31대 신문왕, 정명은 문무왕의 둘째 아들로 재위 기간은 681년~691년으로 11년간입니다. 짧은 재위 기간이지만 어떤 왕들보다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국사시험에 꼭 한 문제 정도는 나올 정도로 중요한 왕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신문왕의 업적위주로 알아보고, 왕릉에 대해서는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왕, 신문왕 665년 동복형 소명태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신문왕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과 아버지 문무왕의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자랐어요. 성인이 되고, 태자가 되면서부터 이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마 배우고 느끼고 있었겠지요. 진골귀족의 득세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면 전쟁 공신들은 거만해지며, 자신들의 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