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 유적 (25) 썸네일형 리스트형 노서동 고분군(1) 신라의 역사를 새로 쓰다. 서봉총과 호우총 노동동 고분군에 이어서 오늘은 도로 하나를 두고 인접해있는 노서동 고분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노동동 고분군은 4기의 고분이 있지만, 노서동 고분군에는 총 14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고, 발굴 고분마다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노다지 유적이라 할만합니다. 금관총은 노서동 고분(2)에서 다루기로 하고, 나머지 고분 하나하나 조사해보겠습니다. 노서동 고분 분류 총 14개 고분 중 발굴 조사된 고분으로는 금관총, 표형분인 서봉총(북분)과 데이비드 총(남분), 우총, 쌍상총, 마총 그리고 또 다른 표형분인 은령총과 호우총입니다. 노서동 고분군에서 미 발굴된 고분으로는 봉황대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서봉황대, 서봉황대 바로 남쪽에 있는 표형분인 또 다른 거대 고분 134호분, 그리고 남쪽으로.. 노서동 고분군(2), 금관총의 황금유물 오늘은 앞서 소개한 노서동 고분군(1)에 이어서 노서동 고분의 대표주자 금관총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고분이라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걸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최근 몇년래 계속된 발굴과 연구로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발견되고, 경주시에서도 많은 돈을 투자해 금관총 유물전시관을 만드는 등 조만간 금관총에 관하여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금관총만 별도로 떼어내어 공부해 보았습니다. 신라 유적발굴의 도화선이 된 금관총 일제강점기 가옥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무덤으로, 발견 당시 도굴된 것처럼 봉분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지요. 하지만 뜻밖의 금관이 발견되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세계 역사 학술지 커버에 게재되면서 세계적인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더.. 노동동 고분군 그리고 봉황대 경주에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분입니다. 경주 어는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대릉원 고분군에 속해 있으면서 대릉원 후문 맞은편에 있는 노동동 고분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노동동 고분에는 봉황대, 금령총, 식리총 그리고 옥포총 등 4개의 고분이 밀집해 있습니다. 하나하나 찾아가 보겠습니다, 고분의 구분 먼저 무덤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왜 그런지 알아 볼까요. 일반적인 모든 무덤을 묘라고 합니다. 묘 중에서 봉분이 있는 오래된 무덤을 고분이라 하고, 고분중에서 왕과 왕비 그리고 귀족의 무덤으로 예상되나 그 주인을 알수없을 경우와 규모가 큰 고분을 총이라고 합니다. 그 총중에서 주인을 알 수 없을 경우 발굴 시 특징적인 유물의 이름을 붙여 OO총 이라 이름 짓고, 무..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불교공인- 신라 최대의 사건 신라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은 뭐니뭐니 해도 불교 공인(527년) 일 것 같습니다. 신라를 이야기할때 불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수가 없지요. 그런데 신라의 불교 전래는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많이 늦었지요. 그러나 뒤늦게 시작된 불교는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라의 불교 전래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불교 전래 과정에서 발생한 이차돈의 순교가 가져다준 의미는 무엇이고, 불교 공인후 신라사회는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부족 연맹체의 천신 신앙과 왕권의 제약 불교 공인 전인 5C~6C 초 신라의 상황을 한번 알아볼까요. 지증왕이 즉위(500년) 한 후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고, 마립간에서 왕으로 칭호를 바꾸며, 왕..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쓴 이유 오늘은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김대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들을 썼는지를 먼저 알아보고, 화랑세기를 쓴 연유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김대문 부분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족 출신 정치가이자 역사학자 김대문은 신문왕, 효소왕 그리고 성덕왕 때의 사람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면 귀족의 자제이고, 성덕왕 때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산주의 도독이라 함은 지금의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도지사 격이지요. 특히 한산주는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이고 북쪽의 국경을 책임지는 중요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9주5소경이 신문왕대에 실시되었으니 이제 막 자리 잡을 시기였지요. 그 무렵 그 정도의 중요한 지역을 책임지는 자리는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최소 진골 이상.. 효소왕과 성덕왕의 왕권강화와 뿌리깊은 진골세력들의 권력다툼 이번에는 효소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효소왕대의 정치상황과 치적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고, 성덕왕과의 왕위 계승과 성덕왕대의 귀족들과의 권력관계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어린 효소왕과 신목왕후의 섭정 효소왕은 신문왕에 이어 6살의 나이로 등극한 7C 마지막 왕입니다. 어린 나이로 인해 어머니 신목 왕후의 섭정과 아버지 신문왕 등극 시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왕족 출신 공신들에 의해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 남시와 서시를 설치해 지증왕 때의 동시와 함께 3개의 시장을 갖추었어요. 이는 통일 후 경주에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제도를 정비 설치하고, 옛 고구려 남부지역인 패서(송악) 지역을 개발하고 축성을 하였어요. 발해가 건국하자.. 흥덕왕과 장화부인 사랑일 까 연민일까. 왜 이리 먼곳까지 왔을까 오늘은 신라역사에 대해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부부사랑의 대명사 흥덕왕과 장화 부인, 그리고 사진 마니아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 흥덕왕릉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함께 흥덕왕릉의 숨은 역사를 찾아 한번 가볼까요. 왕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어래산 동쪽 기슭인 안강읍 육통리에 있습니다. 동남쪽으로 넓은 안강 뜰이 펼쳐진 양지바른 곳이지요. 정면 맞은편에는 조선시대 전통 양반마을인 양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대 다른 왕릉들과는 다르게 이곳은 왕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흥덕왕의 왕비인 장화 부인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2달 만에 숨을 거두게 되지요. 이후 약 10년이 흘러 흥덕왕도 유언으로 장화 부인과 합장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신라 최대의 전성기 성덕왕, 그리고 격식 갖춘 성덕왕릉 오늘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더 잘 알려진 성덕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왕들과 다르게 성덕왕을 '성덕대왕'으로 부릅니다.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성덕대왕의 치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성덕대왕릉의 특징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선대 왕들의 탄탄한 기반 33대 성덕대왕은 이름 그대로 굉장한 덕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인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신문왕이 나라의 기반을 튼튼이 한 덕분에, 효소왕을 이은 성덕왕은 신라 최대의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지요. 사서의 기록에 출생에 관한 것은 없으나 효소왕처럼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8C초부터 약 35년간, 다른 왕들에 비교해 오랜 기간 재위하였습니다. 재위 초기 권신들에 ..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