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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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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알수없는 경주신라의 고분들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주 신라의 고분들 오늘은 경주 신라고분들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아는 데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먼저 고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왕릉의 주인을 정하는 문제에 많은 차이가 있는것 같아요. 그래도 가장 일반적인 내용을 알아보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1> 주인을 알수없는 고분들 경주에 있는 고분들은 주인을 알 수 없는, 즉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고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봉분이 작은 것은 물론이고, 왕릉급의 대부분의 고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56대의 신라왕들 중에서 명확하게 누구의 왕릉으로 지정할 수 있는 능은 8기뿐이지요. 선덕여왕릉-낭산과 사천왕사의 지명으로 확실시 문무대왕릉-역사적 기록, 수중릉 태종 무열왕릉-능비 서악동 고분군..
경주에서 만나는 너무나 친숙하고 아름다운 신라의 고분들 고분의 구분과 변화 경주에 가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신라의 고분들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서 기다려 줍니다. 커다란 고분들이 여기저기 시내 곳곳에 연이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지요.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이 옛 유적과 고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고분(무덤)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경주에 있는 고분들을 보면 우리는 죽음 보다는 푸근하고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분을 처음 본 외국인들은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크기에 한번 놀라고, 이렇게 사람 사는 가까이 있는 것에 놀라고, 아름답게 잘 보존되는 것에 또 놀란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자랑거리인 이러한 경주의 고분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발달해 가는지를 알아 보겠습니..
신라사회를 지탱하는 철저한 신분제도인 골품제와 화백회의 신라의 지배계층 및 사회를 이해하는데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그중에서 화백회의, 골품제, 화랑제도 그리고 불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네 가지만 공부하여도 신라사회를 좀 더 잘 알 수 있어요. 오늘은 화백회의와 골품제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추후에 별도로 하나씩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화백회의 화백회의는 국가 중대사에 대한 귀족들의 협의체입니다. 고대 사로의 부족장 회의인 남당 제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진골 출신의 귀족들의 모임으로 의장은 상대등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은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야 안건이 통과된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왕권을 견제할 수있을 정도로 강력하였습니다. 25대 진지왕의 경우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서 폐위를 결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어요. 또..
저녁놀이 아름다운 진평왕릉, 가을이면 불심은 더욱 타오르고 진평왕은 신라 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년에서 632년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신라왕으로는 드물게 약 50년 동안 재위하였어요. 긴 재위 기간만큼 나라 안팎으로 복잡 다난한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진평왕의 능과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진평왕릉. 진평왕릉은 경주(서라벌) 벌판 동쪽 끝, 명활산 아래에 있어요. 흔히 보문 뜰이라고도 하는데 경주시내에서 알천(북천)을 따라 보문단지로 가다가 우측 보문 마을 진입로를 따라가시면 마을 서측에 있습니다. 능은 좀 규모가 큰 편이며, 능 주변의 특별한 치장이니 장식은 없어요. 상석과 표지석 정도가 있고 능 둘레에 괴석(보호석)이 간혹 보이는데 봉분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괴석을 ..
오로지 선덕여왕만을 위한 사찰, 분황사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습니다. 분황사! 향기로운 기운이 도는 황실 사찰이란 뜻입니다. 절을 만든 왕은 선덕여왕(634년)인데, 그 당시만 해도 황실에서 주관해 만든 절들이 꽤 많이 있었을 텐데 굳이 왜 여왕은 또다시 절을 만들었을까요. 지금도 하나의 절을 만든데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드는데 말이에요. 오늘은 선덕여왕에 대한 많은 역사적 기록과 설화들이 있지만 인간 덕만에 대한 시각으로 분황사만을 연결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본래 여왕의 이름은 덕만인데, 아버지 진평왕이 석가모니 누이의 이름이 덕만이라고 해서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선덕은 죽은 후의 시호로 우리는 선덕여왕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1> 규모는 작지만 아늑하고 조용한 사찰 분황사는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황룡사가 있었고, 동쪽은 용이 나..
경주시내 유적지 관광할때 주차장은 어디에 경주는 오래전부터 관광지 경주는 오래전부터 전국적인 관광지라 지역 인프라가 나름 잘 갖추어져 있었어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기차도 연결되어 있고 보문단지와 불국사 지역은 숙박시설도 많이 있지요. 도로와 도로변의 화단과 가로수도 예쁘게 잘 가꾸어져 있어요. 처음엔 신혼여행도 경주로 많이 왔어요. 그다음에는 해운대로, 그다음엔 제주도로, 지금은 해외로 다들 가는 것 같습니다. 수학여행은 전국의 모든 학교들의 필수 방문 코스이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경주를 오시는 분들은 옛날을 기억하며 추억여행을 많이 오시는것 같아요. 부모님과 본인에게는 추억을, 아이들에게는 교육과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가족단위로 많이 오시는 것 같습니다. 3대, 4대가 손을 맞잡고 구경하시는 모습은 너무 보기가 좋았습니다. ..
박제상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인가, 가족을 지킨 의리남 인가 박제상,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일까, 가족도 지키지 못한 루저인가, 아니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의리남인가? 우리는 어릴때부터 역사공부를 할 때 신라 때 박제상이란 충신에 대해 배워 잘 알고 있지요. 우리나라 대표적인 충신의 표상이기도 하고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왕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의 모범으로 어릴 적부터 우린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좀더 이성적으로 사고할 나이가 되었을 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무모하고 용맹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 동기가 궁금해지네요. 왕의 동생 한 명을 구한 것만 해도 대단하게 칭찬받을 일인데, 왜국으로 가면 분명 살아오지 못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경주문학여행, 김동리의 무녀도 그리고 금장대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무대 금장대 예기 청소 경주가 낳은 대표적인 문학인으로는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이 있어요. 그중 오늘은 김동리와 그가 쓴 소설 무녀도, 무녀도의 무대가 되는 금장대 예기 청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무녀도 무녀도는 무당인 엄마 모화와 기독교를 믿는 아들 욱이의 갈등을 그린 소설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본 소설이고, 대략적인 내용을 알 정도로 유명한 김동리의 대표 소설이지요. 종교적 갈등으로 모화의 칼에 욱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모화는 예기 청소에서 굿을 하던 중 물속으로 빠져 죽는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이지요. 그 시절은 한창 서구 문명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혼란한 시대였어요. 그래서 전통적인 신앙과 근대적 문명의 갈등, 충돌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